사카이야 다이치는 베스트셀러 ‘지가(知價)혁명’ 등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일본의 경제평론가다. 1998년 ‘일본경제 재생’의 기수로 경제기획청 장관에 발탁되자 “오로지 양심만을 바탕으로 경기(景氣)를 판단하겠다”고 입을 열었다. 2년5개월 뒤 이임 때 사카이야는 “정치가의 공명심은 경기 회복의 적(敵)”이라는 말을 남겼다. ‘일본 정부가 경제를 중립적인 안목에서 보게 된 것은 사카이야 장관 덕’이라고 평가받은 그다.
오늘의 한국경제 상황이 사카이야를 떠올리게 했다. 9년 전에 만났을 때 그는 “일본은 질투(嫉妬)사회”라며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들을 질투심이라는 코드로 설명했다. 주어진 여건에 순응하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듯한 모습과는 다른 ‘일본인 심리학’이었다. 그는 또 일본인의 ‘나만 빼고 주의(主義)’를 걱정했다. “잘못되는 일이 있어도 나를 고치겠다고는 않는다. 너희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20세기 중후반의 미국 석유왕 폴 게티는 자본가에 대한 질시(嫉視)에 시달리다 이런 말을 뱉었다. “그래 그러면 미국의 돈을 다 모아서 나에게도 거지에게도 똑같이 나눠줘 봐라. 1시간만 지나면 나는 다시 부자가 돼 있을 것이고, 여전히 빈털터리도 나올 것이다.”
일본도 미국도 우리와 다를 게 없다고 자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 성숙도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이기심에도 상생(相生)의 슬기를 얼마나 발휘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법하다. 미국인들은 동네에 작은 슈퍼마켓 하나라도 들어서면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아끼지 않는다. 자신이 거기 취직하지 않더라도, 새로 생긴 몇 개의 일자리가 소득과 소비를 일으켜 자기에게도 득이 된다는 계산을 할 줄 알기 때문일까.
미국 서부 이스트팰러앨토시(市)의 공식홈페이지 표지엔 사진 두 장이 크게 실려 있다. 시청 전경도, 시장님 얼굴도 아니다. 이 도시에 지점을 낸 스웨덴계 가구업체 이케아의 전경과 고객들을 담은 사진이다. 사진 위에는 ‘이케아 그랜드 오프닝!’이라는 글씨가 굵게 쓰여 있다. 한국이라면 시청이 업체 홍보한다고 난리 났을지 모를 일이다.
“한국이 부자가 되고 싶다면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 제프리 존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명예회장이 며칠 전에 한 말이 뼈아프다. 사카이야 역시 일본인의 질투심을 얘기했지만 존스는 ‘아무래도 한국인은 유별나다’고 느낀 모양이다.
나라 안에서 돈이 많이 돌수록 부자나라다. 돈이 있어도 안에선 돌지 않고 해외로 더 빠지면 경제와 민생이 시들 수밖에 없다. 투자도 소비도 나라 안에서 되지 않는데 일자리와 소득이 더 생기긴 어렵다.
그래도 더 가진 자를 보면 배가 아플 자유는 있다. 하지만 북한을 닮아가더라도 아픈 배가 ‘부른 배’로 바뀌진 않는다. 설혹 그런 체제로 나라가 바뀌더라도 돈은 자신을 보호할 먼 곳으로 먼저 도망가 있을 터이다. 줄어든 돈으로 아무리 발버둥쳐도 부자나라는 더 아득해진다. 저수지 물이 마르는데 공평하게 나눈들 논물이 넉넉할 리 없다.
돈이 돌지 않고 숨거나 해외로 튀는 것은 세상이 불안하고 내일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권력 쥔 신(新)기득층과 세상 한번 뒤집어보자는 한풀이그룹이 손뼉 부딪쳐가며 빈부(貧富)를 선악(善惡)으로 줄긋는데도 불안을 모르는 돈이 있다면 ‘눈먼 돈’이다. 시도 때도 없이 ‘정치적 전선(戰線)’을 만들어 내 편, 네 편 갈라대고 핏발 세우는데 시장경제 원칙이 확실하다고 믿는 돈이 있다면 ‘멍청한 돈’이다.
닷새 전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외국계 증권사가 투자자들에게 ‘이제 한국 정치가 투자의 문제점’이라고 조언하는 상황이 됐다”고 보도했다. 모건스탠리의 한국통 연구원은 “한국 사회는 새 지도자들이 보수세력을 갈아 치우면서 혁명기를 겪고 있다. 한국이 사회주의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돈은 먼저 안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 행동할 뿐이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