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태(金智泰)씨는 1960~70년대 부산 지역의 신발과 섬유업계를 평정해 큰 부(富)를 쌓은 기업인이다. 당시 '서울은 이병철(李秉喆·전 삼성그룹 회장), 부산은 김지태'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는 1908년 부산에서 12대째 살아온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27년 3월 부산제2상업학교(부산상고의 전신)를 졸업한 뒤 동양척식회사(동척) 부산지점에 입사해 4년간 근무했다. 또 동척으로부터 경남 울산 지역의 전답 2만평을 불하받았다. 동척은 일제가 식민지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다.
이와 관련해 자명(김씨의 호) 김지태 전기 간행위원회가 펴낸 김씨의 평전 '문항라 저고리는 비에 젖지 않았다'는 "민족의식이 누구 못지않았던 자명이 동척에 입사했다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고 밝히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최근 국회에 제출한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 원안에서 '은행·회사·조합·산림·어장·공장 및 광산 등의 간부 또는 직원으로서 우리 민족의 재산을 수탈한 자'로 한정했던 경제침탈기구 관련자를 '경제침탈을 위해 일제가 만든 각종 경제기관과 단체에 재직한 자 중 침탈행위에 적극 협력한 자'로 확대했다.
그는 1935년 부산 범일동에서 제지회사인 조선지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일본의 대륙침략 전쟁에 따른 군수물자 시장의 확장에 힘입어 날로 번창했다.
그는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1943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주철공업합자회사를 인수했으며 1949년 적산(敵産) 기업이던 아사히견직(조선견직주식회사의 전신)의 관리인을 맡게 됐다. 또 1954년 신발제조공장으로는 당시 전국 최대 규모였던 삼화고무를 인수해 전국 10대 재벌의 반열에 올랐다.
기업 활동을 하면서 그는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을 인수했고 2대와 3대 국회의원(부산 갑)을 지냈다. 또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를 설립했다.
그는 1962년 5월 군사정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구속됐다. 혐의는 밀수입과 국내재산해외도피, 농지증명서허위작성 등 3가지.
그는 검찰부에 의해 징역 7년이 구형됐으나 공소취하의 대가로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부일장학회의 기반이었던 부산 서면 일대 땅 10만평을 헌납하고 풀려났다.
김씨의 평전엔 '박 전 대통령이 혁명 직전 자금 제공을 요청했으나 이를 거절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군부가 5·16혁명을 일으킨 뒤 밀수 등의 허위 혐의를 뒤집어 씌워 버틸 수 없었다'는 대목이 있다.
한편 김씨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간접적인 인연이 있다. 노 대통령은 부일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아 중학교를 마쳤고 부산상고 진학 후에도 김씨가 만든 부산상고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아 학교를 다녔다.
또 노 대통령은 변호사로서 1980년대 중반 김씨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100억원대의 상속세 소송을 맡아 승소, 조세전문 변호사로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석동빈기자 mobidic@donga.com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