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국가정체성’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이 한창이다. 상생의 정치를 앞세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도 일단 치열한 싸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략적 싸움 때문에 ‘경제 살리기’와 민생은 뒷전이라는 말도 어폐가 있다. 어떤 경제를 어떻게 살릴지 정당마다 입장이 다른데 정쟁 없이 경제문제에 접근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 어떤 나라에 정략적 계산을 하지 않는 정당이 있는가. 정치에서는 싸움이 기본이다. 그걸 자꾸 금기시하고 부정적으로 보면 정치에 대한 불신과 허무주의만 부추기게 되지 않겠는가.
▼평가 엇갈리는 박정희시대▼
여권은 과거사의 포괄적 진상 규명을 주장하고 야당은 미래를 향해 갈 길이 바쁜데 과거에 집착한다고 비판한다. 노무현 정부의 ‘국가관’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민주화 세력’ 대 ‘산업화 세력’이 과거를 갖고 싸우지만 사실 그게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정치적 싸움이라는 것쯤은 다 안다.
민주화 세력의 상당수가 오늘날 여당이 돼서 하는 일을 보면 파병결정을 포함해 실망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제 정당했다고 오늘도 계속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어제 나쁜 일을 한 사람들이 오늘도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몰아붙이면 안 된다. 전과자에 대한 편견이 범죄를 재생산하는 것을 모르는가. 하지만 그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산업화 세력에 대해 몇 마디하고 싶다.
오늘날 과거 ‘군사독재’ 세력이라 불리던 집단은 사라졌다. 요즘 ‘민주화 세력’에 맞서는 이들은 ‘산업화’ 혹은 ‘근대화’ 세력을 자연스럽게 자처한다. 민주화 덕택에 이제 과거의 부정적 유산과 거리를 둬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독재세력으로 규정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그렇다고 민주화에 의도적으로 적극 기여한 과거가 없는 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민주화’에서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산업화는 제3의 ‘간판’이다. 그러니 뭔가 뒷전이 불안한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 공을 강조, 윤색하고 민주적 개혁을 저지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가능하다. 물론 산업화 세력은 ‘조국 선진화’ 덕택에 이만큼이라도 살고 민주주의도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1960, 70년대 고도성장이 저임금, 초강도 노동, 노동권에 대한 탄압에 기초했다는 비판론도 많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이뤄진 압축적 산업화에 대한 평가는 명암이 엇갈린다. 그것을 주도했던 과거의 독재세력에 대한 비판을 한다 해서 그 긍정적 경제 유산에 대한 평가에 인색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보, 자본, 사람이 초고속으로 지구를 돌아다니는 탈산업화 시대에 자꾸 산업화 전설에 기대는 것은 순경제적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미래를 가로막는, 과거에 대한 퇴행적 집착으로 비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수호를 외치며 ‘국가정체성’을 문제 삼고 나오는 데 대해 그것이야말로 자가당착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산업화 세력은 민주주의와 헌법을 지키기 위해, 그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몸 바쳐 싸운 경력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픈 말이 되겠지만, 되레 민주주의를 저지하고 헌법을 철저히 무시하는 데 앞장선 경력이 돋보이지 않을까? 그런 세력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사람들이 ‘정체성’을 자꾸 들고 나온다면 누워서 침 뱉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그 말이 현재는 진심이라고 해도, ‘과거지사’는 자신이 직접 한 게 아니라고 손을 털어도 누가 믿어 주겠는가.
▼발목잡는 ‘과거’와 절연해야▼
이제 산업화 세력으로 불리는 집단은 발상의 대전환을 해야 한다. 과거를 묻어둘 게 아니라 오히려 파헤쳐 과오가 있다면 인정하고 그것과 절연해야 한다. 제살을 깎아 먹는 아픔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현재와 미래의 발목을 붙잡는 ‘과거사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래야 ‘민주화 세력’에 맞서 할말이 생기고 힘이 생긴다. ‘산업화 세력’의 구태의연한 틀에서 벗어나 ‘민주적 신보수 세력’으로 거듭나는 용기를 보고 싶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