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내에서 국가 정체성 및 과거사 진상 규명 논란 등 현안 대처 방식에 대한 비판론이 공식 제기돼 파장이 일고 있다. 그동안 일부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속도 조절론’이 거론되기는 했지만 지도부를 정면 겨냥한 비판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부영(李富榮) 상임중앙위원은 이날 오전 확대간부회의에서 전날 야4당의 카드대란에 대한 국정 조사 제의를 당이 일축한 데 대해 “야당이 이 문제를 파헤치자고 할 때 함께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자고 하는 게 여당으로서 올바른 자세 아니냐”며 “이런 것이 민생 경제를 살리는 일”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신기남(辛基南) 의장 등 당 지도부가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의 국가 정체성 문제 제기에 대해 “우리 당은 민생 경제를 최우선으로 삼는다”면서도 정수장학회 관련 의혹을 제기하며 정쟁을 주도하고 있는 것을 겨냥한 것이다.
이어 이 위원은 방일 중인 천정배(千正培) 원내대표가 2일 “친일진상규명법은 순수 국내 문제이지 일본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왜 국내용이냐”며 최근 당의 원내 전략을 싸잡아 비판했다. 그는 “(야당의 공세를) 무조건 수를 써서라도 막아보려는 자세로는 여당 노릇을 못할 것”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김혁규(金爀珪) 상임중앙위원도 “최근 지역 주민들을 만났는데 국민은 정체성 논란이 뭔지 관심이 없고 경제가 회복됐으면 하는 바람만을 갖고 있다”며 “(정쟁을) 안 하기로 해놓고 우리 당이 계속 하는 것 같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말로만 하지 말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해 ‘무늬만 민생 경제론’을 꼬집었다.
이 위원 등의 이날 발언이 당 내에 전해지면서 “어떻게든 빨리 여야간 진흙탕 싸움을 매듭지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화론(主和論)’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특히 전문가 그룹 출신 및 중진 의원들 사이에서는 “집권 여당이 야당의 발언에 매일 맞장구를 치는 식으로 대응하면 되겠느냐”며 지도부의 전략 부재에 대한 불만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 전문가로 분류되는 한 초선 의원은 이날 기자와 만나 “3일 지역구 내 재래시장에 갔는데 총선에 출마할 당시보다 절반 이상 매출액이 줄었다고 아우성이었다”며 “국민이 지금 여야 공방에서 무슨 민생 회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특히 중진 의원들 사이에서 “정체성 논란에 대한 지도부의 일관된 입장이 없다”며 당 지도부의 오락가락하는 대야 전략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높았다. 서울의 한 중진 의원은 “신 의장이 3일에는 정체성 논란에 대해 ‘일절 대응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하루 만인 4일 ‘상대방이 공격하면 대응한다’며 입장을 바꾸면 어떻게 하느냐”고 푸념했다.
이와 함께 당 일각에서는 당-청간의 정무 시스템 부재에 대해서도 시급히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승헌기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