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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그대, 순정 로맨스를 꿈꾸는가

입력 | 2004-08-05 16:42:00

원수연의 만화 ‘풀하우스’. 최근 순정 로맨스 감성이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방송 드라마로 각색돼 인기를 얻고 있다. 20,30대의 순정로맨스 감성은 그들이 어려서부터 읽은 순정만화에서 상당 부분 비롯된다. -그림제공 ㈜서울문화사


순정 로맨스 감성이 요즘 세상을 지배한다는 생각, 들지 않나요.

백마 탄 왕자님 스토리인 방송드라마 ‘파리의 연인’, 동명의 순정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풀하우스’, 할리퀸 로맨스 소설이 원작인 드라마 ‘불새’…. 소녀적 감성이 미디어 속에 팔팔 살아 뛰고 있습니다.

인터넷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900여만명의 네티즌은 귀여운 아이가 미니룸의 주인공인 ‘순정’한 공간 싸이월드에서 정보 대신 감성을 공유합니다.

순정한 감성을 즐기는 어른들은 곧잘 ‘유치하다’는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방송의 트렌디 드라마를 비판할 때 단골로 쓰이던 ‘순정 만화, 할리퀸 로맨스 같은’이란 표현은 또 얼마나 경멸적이었던가요.

이젠 세상이 달라졌나 봅니다. 순정 만화류의 드라마를 비난하던 남자들도 TV 앞에 앉고, 싸이월드에서 예쁜 벽지와 가구를 구입해 홈피를 치장합니다. 여성적이고 로맨틱한 감성이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뛰쳐나와 화려하게 웃고 있습니다.

20대 여성이 할리퀸 로맨스 소설을 고르고 있다. 사랑이 주요 테마인 이들 소설은 사춘기 소녀적 감수성을 자극한다. -이종승기자

○ 당당한 순정 로맨스

서점 북스 리브로의 서울 을지점 만화 담당 송경원 주임은 “요즘 순정 만화 애장본을 찾는 고객 중 절반은 남자”라고 말한다. 경제력을 갖춘 20대 후반, 30대 남자들이 만화 대여점을 이용하는 대신 만화를 소장하길 원하며, 그 장르가 바로 순정 만화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유리 가면’ ‘굿바이 미스터 블랙’ 등 순정 만화를 즐겨 읽었다는 사업가 오제형씨(32)는 “순정 만화에서는 전통적인 남자 만화에 없는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순정 만화적 감성이 인간관계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20대 후반, 30대는 국내에서 순정 로맨스를 본격적으로 향유한 첫 세대다. 1970년대 후반 TV에서 방영된 일본 만화 ‘캔디 캔디’가 지금 30대가 된, 당시 10대 소녀 독자층을 열광시켰다면 ‘베르사이유의 장미’ ‘올훼스의 창’ ‘아르미안의 네 딸들’ ‘별빛 속에’ 등 방대한 서사 구조를 지닌 순정 만화들은 이후 소년 독자층도 함께 끌어들였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들은 감정 표현이 서툴렀던 이전 세대 남자들에 비해 풍부한 감성을 가진 ‘메트로 섹슈얼’로서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귀엽고 깜찍한 여자가 멋진 남자를 만난다는 1980년대 순정 만화 공식의 드라마 ‘파리의 연인’이 시청률 50%를 넘어선 데는 남자 시청자들의 지지도 한몫했다. 시청률 조사 기관인 TNS 미디어 코리아에 따르면 이 드라마 전체 시청자 중 남자 비율은 39.7%이다. 과거 비슷한 장르의 드라마 시청자 가운데 남자의 비율은 35%대였다.

영화전문지 ‘씨네 21’의 남동철 편집장(36)은 순정 로맨스류의 드라마를 거의 본 적이 없지만 ‘파리의 연인’만큼은 빠뜨리지 않고 시청한다.

그에 따르면 이 드라마에서 ‘백마 탄 왕자’인 기주 (박신양)를 바라보는 남자 시청자들의 감정은 “부러움”이다. “과거 왕자들처럼 무조건 여자에게 잘 대해주는 착한 남자가 아니라 판단이 빠르고 상황에 따라 강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또 기주가 이혼남이라는 사실에 대해 남녀 모두 거부감을 갖지 않고 오히려 ‘결혼에 대해 알만큼 아는 현실적인 남자’로 이해하는 것도 달라진 현상이라는 것이다.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신데렐라 판타지’를 드러내기 부끄러워하지 않는 요즘 커리어 우먼들도 순정 로맨스의 주된 소비층이다. 회사원 박효진씨 (32)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치열한 경쟁에 지친 여성들이 독립된 존재를 꿈꾸기보다 오히려 안락한 삶을 보장해주는 ‘왕자님’의 존재를 애타게 기다린다”고 말한다.

순정 만화 '캔디 캔디'를 연상시키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각박한 현실에 판타지를 준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위)과 '불새' -동아일보 자료사진

○ 곳곳에 부는 순정 바람

‘순정’ 바람은 일상 곳곳에 반영되고 확산된다.

예전 같으면 “사랑 타령 드라마를 보느냐”고 비난했을 남자들도 ‘파리의 연인’ 주제가를 휴대 전화 컬러링 음악으로 ‘당당하게’ 설정한다. 아내나 애인의 직장에 전화를 걸어 드라마 속 대사를 본따 “우리 애기 좀 바꿔 주세요”라고 스스럼없이 표현한다. 요즘 20, 30대 남자들이 여자 친구와 통화할 때 건네는 첫마디는 “애기야, 지금 바빠?”이다.

순정 로맨스 감성은 남녀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디지털 카메라 사진 찍기 놀이를 통한 자신을 드러내기에 익숙한 남자들은 싸이월드 미니 홈피에 지극히 감성적인 사진과 글들을 싣는다. 요즘 20,30대 남자들의 미니 홈피 감성은 다음과 같다.

하나. 형형색색 당구공을 박스 안에 넣은 사진을 찍은 뒤, ‘사람의 마음이 구슬처럼 보여서 그 색깔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글을 쓴다.

둘. ‘여자들이 가지기 원하는 리모콘’이란 제목의 사진을 올린다. 사진 속 리모콘 버튼의 영어 단어를 조합하면 ‘내 목을 애무해 주세요(Rub my neck)’, ‘내게 장미를 사주세요(Buy me roses)’등의 문장이 완성된다.

셋. 무더웠던 날의 시간대별 감상 기록.

이들은 더 이상 드라마 내용이 현실적인가 아닌가를 문제 삼지 않는다. 대신 드라마 속 주인공의 고급 승용차, 넥타이와 슈트, 근사한 레스토랑과 홈비디오 시스템을 눈여겨 본다.

트렌드에 민감한 호텔 업계는 이같은 감성 코드를 놓치지 않았다. 그랜드 하얏트 서울은 촬영장소를 제공했던 드라마 ‘불새’와 ‘파리의 연인’의 이름을 딴 패키지 상품을 판매했다. 호텔 리츠칼튼 서울도 지난해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패키지’에 이어 올해 남성 전용 주말 패키지 ‘그의 최고의 주말’을 개발해 감성파 남성 고객을 겨냥한다.

지난달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드라마 숙박 패키지를 이용한 회사원 김지영씨(32)는 4번째인 결혼기념일을 맞아 호텔에서 남편과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드라마 주인공들이 피아노를 연주하며 사랑을 고백했던 공간에서 자신들의 로맨스를 키워 보는 것이다. 패키지 이용을 먼저 제안한 사람은 김씨의 남편이었다.

○ 사춘기 유혹한 할리퀸 소설과 순정 만화

‘파리의 연인’에서 수혁(이동건)의 등에 업혀 ‘괴로워도 슬퍼도’를 노래 부르는 씩씩한 태영(김정은), ‘불새’에서 사고로 다리를 다친 여자(정혜영) 곁에 도의적 책임으로 머물렀던 남자 주인공(이서진)의 모습은 과거 ‘캔디 캔디’ 독자층의 ‘데자뷔(Deja View·기시감)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드라마 ‘불새’는 영국 작가 로버타 리의 할리퀸 로맨스 소설 ‘그에게 맞지 않는 여자’가 원작. 할리퀸 로맨스 소설은 1960년대 미국 할리퀸 엔터프라이즈사가 펴내기 시작한 순정 로맨스 시리즈로 현재 110여 개국에서 연간 1억7500만권이 판매된다. 국내에서는 1986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다. 교과서 사이에 몰래 끼워 읽기 좋게 손바닥만한 크기였던 이 책은 신데렐라 스토리와 아슬아슬한 사랑 묘사 등으로 사춘기 소녀들의 감수성을 크게 자극했다. ㈜신영 미디어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현재 10만여 명의 회원이 가입해 스스로 창작한 순정 로맨스 소설을 활발히 게재한다.

할리퀸 로맨스 소설과 함께 20대 후반과 30대에게 상상력을 키워준 또 다른 젖줄은 순정 만화다. 순정만화는 1950년대 가족 만화의 형태로 시작된 뒤 1970년대 일본 순정만화의 대거 유입 이후 1980년대 하나의 장르로 정착됐다.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박인하 교수는 순정 로맨스 붐이 지속되는 것에 대해 “성적 매력이 거세된 귀엽고 깜찍한 여주인공의 설정은 트렌드에 얽매이지 않고 실패의 위험성을 최소화할 수 있어 수십년간 되풀이해 대중 문화에 활용된다”고 말한다.

빠듯한 월급과 집세를 걱정하고 여름휴가의 추억을 벌써부터 그리워하는 평범한 일상에서 순정 로맨스가 가져다주는 동화같은 상상력은 세상 시름을 덜어내 주는 순기능이 있다.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주철환 교수는 “순정 로맨스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것은 술을 마시는 행위와 흡사하다”고 말한다.

안정적 경제구조와 사회보장제도를 갖춘 서북유럽의 방송에서는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현실이 각박할수록 사람들은 잃어버린 낭만과 로맨스를 그리워하며 순정한 꿈에 빠져든다. 일확천금(金)보다는 일확천애(愛)를 꿈꾼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국내 순정 만화의 세대별 시기별 구분구분연도개요대표작가와 주요작품1세대 순정 만화1950년대가족만화로 기획된 순정 만화김종래 ‘눈물의 수평선’, 박기정 ‘푸른 하늘 은하수’, 최상록 ‘오빠 만세’1960년대가족만화에서 소녀취향 만화로 변화권영섭 ‘울 밑에 선 봉선이’, 민애니 ‘인어 언니’, 엄희자 ‘세 자매’1970년대 중반검열완화로 세련된 소녀취향 만화의 등장공백기1970년대 중반 이후1977년 MBC ‘캔디 캔디’ 방영이후 일본 소녀만화 대거 유입.국내 순정 만화 공백기이가라시 유미코 ‘캔디 캔디’, 이케다 리요코 ‘베르사이유의 장미’, 와타나베 마사코 ‘유리의 성’, 다케미야 게이코 ‘파라오의 무덤’2세대순정 만화(대여점 만화로 데뷔) 1980년대 초반로맨틱 순정 만화 인기에 힘입어 장르 정착기 시작이혜순 ‘자매의 창’, 한승원 ‘다섯 번째 계절’, 김동화 ‘아카시아’, 황미나 ‘안녕 미스터 블랙’ ‘불새의 늪’ 1980년대 중반 이후순정 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여성작가들 등장으로 순정 만화의 부흥기김진 ‘1815’, 김혜린 ‘북해의 별’, 신일숙 ‘아르미안의 네 딸들’, 강경옥 ‘별빛 속에’1988년∼1990년1988년 순정 만화 전문잡지 ‘르네상스’ 창간으로 순정 만화 잡지 시대 돌입이은혜 ‘댄싱 러버’, 이정애 ‘루이스씨에게 봄은 왔는가’, 원수연 ‘엘리오와 이베트’, 김기혜 ‘터치 앤 터치’3세대 순정 만화(만화잡지로데뷔)1990년 이후순정 만화 잡지의 연령별 분화. 아동층 ‘밍크’‘파티’, 청소년층 ‘윙크’‘이슈’, 성인층 ‘나인’‘화이트’황미나 ‘레드문’, 김진 ‘바람의 나라’,김혜린 ‘불의 검’, 신일숙 ‘리니지’, 이은혜 ‘블루’, 박희정 ‘호텔 아프리카’,천계영 ‘언플러그드 보이’, 강현준 ‘CAT'자료:박인하의 ‘누가 캔디를 모함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