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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정진석/빗나간 ‘親日청산’ 경계한다

입력 | 2004-08-05 19:06:00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자탄이 투하됐을 때 조선의 왕족 이우(李우)가 폭사했다. 그는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 이강(李堈)의 차남으로, 1912년에 태어나 일본 학습원(學習院)에서 공부했고, 육사를 졸업한 뒤 중좌로 승진한 33세 청년이었다. 군인으로 ‘대륙(중국)에서 위훈을 세운 후’ 6월 10일 히로시마에 부임하여 군 참모로 근무하던 중 원폭에 맞아 전사했다고 일본 육군상은 애도했다.

▼日軍복무한 조선왕족도 친일?▼

당시 유일한 조선어 신문이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원폭투하라는 엄청난 사건을 8일자 1면 아랫부분에 2단 기사로 대수롭지 않게 다루었다. ‘적(敵) 신형 폭탄 사용, 廣島市에 상당한 피해’라는 제목으로 “적은 이 공격에 신형 폭탄을 사용한 것 같은데 상세한 피해규모는 조사 중”이라는 간단한 ‘대본영(大本營) 발표’를 실었다. 같은 날짜 1면 머리기사는 ‘장절(壯絶) 함대육탄(艦隊肉彈), 불멸(不滅)할 해상특공대 수훈, 제국 해군 혼의 정화’였다.

8일 0시 소련군은 마침내 일본을 상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만소(滿蘇) 국경과 북조선 국경을 넘었다. 일본의 패망은 시간 문제였다. 8월 10일, 일본 육군대신은 “단호히 신주(神洲)를 호지(護持)하라”며 독전했다. 12일자 매일신보는 이런 비장한 결의를 담은 지면에 나가사키(長崎)에 떨어진 두 번째 원자탄 기사를 1면 맨 아랫부분에 2단으로 간단하게 배치했다.

일본은 이처럼 패망 직전까지 정확한 전황을 알리지 않았다. 여러 해 동안 군부가 발표하는 왜곡된 정보와 일본제국을 향해 충성을 강요하는 내용이 지면을 가득 메웠다. 승리를 확신하는 광적인 사회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던 일본이 사흘 뒤인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 이 땅에서 역사 청산 논란이 뜨겁다. 일본군 소위 이상을 친일 조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오늘날 영관급에 해당하는 중좌로 일본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이우는 명백한 친일파라고 할 것이다. 이우의 아버지 이강 역시 일본 육군 중장으로 조선군사령부에 등청했다는 신문 기사가 1921년 5월에 나온다. 고종의 일곱째아들인 영친왕 이은(李垠)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장을 지냈다.

이렇듯 국권 피탈과 친일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43년 동안이나 전제군주의 자리에 있었던 고종과 왕족들의 책임 문제를 비켜갈 수 없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군주, 그리고 일본군의 고위 장교로 복무한 왕족의 과오는 무겁게 따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문제는 복잡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1910년 한일병합과 그 뒤 35년이나 계속된 일제식민통치의 합법성 논란과 직결되고 민족자존, 국가정체성의 문제와도 맥락이 이어져 있다.

전제군주 고종이 일본에 국권을 내준 것은, 총칼의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 식민지 시절, 왕족들이 일제에 복무한 것도 계속되는 일제의 강제력의 결과였다. 이것이 우리가 내린 ‘역사적’ 결론이다. 군주와 왕족들이 그랬을진대, 그 시대를 산 조선의 일반 백성들이야.

▼정적 공격 위한 역사 짜깁기 우려▼

친일을 규명하고 청산한다는 데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역사의 큰 흐름을 인위적으로 자르고 붙이는 식으로 왜곡하여 이념투쟁의 도구로 삼으려는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 군국주의의 엄혹한 통제 아래 국제 정세를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철저히 차단됐고, 나라를 되찾을 가망이 보이지 않던 때의 일이었다. 복합적 인과관계로 얽힌 시대상을 종합적으로 조망하지 않고 편향된 시각으로 특정 사실을 떼어내 확대하거나 축소한 파편을 치켜들고 반대편을 공격하는 무기로 악용할 경우 장차 또 한번 역사의 심판이 필요할 수도 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