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파월.
‘아이젠하워 이래 가장 명망 있는 군인’은 왜 대통령후보로 나서지 않았을까.
가정을 지키는 것이 더 소중하다?(1995년 불출마 선언)
자메이카 이민 2세로 뉴욕 할렘가에서 자란 파월. 그는 진작에 ‘앵글로색슨-백인-신교도(WASP)’의 벽을 실감했을 터이다. 1964년 인종차별철폐법이 통과되기 전까지 이 육군 장교는 햄버거도 마음대로 사먹지 못했다고 하니.
이제 미국인들은 피부색에 신경 쓰지 않는다? 파월은 고개를 흔든다. “아무도 보지 않는 기표소에서 백인들은 흑인 후보를 선뜻 찍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파월은 자신의 말대로 “아메리칸 드림을 먹고 자랐다.” 그는 흑인에 대한 우대정책의 수혜자다. 그러나 그 ‘정치적 프리미엄’은 소진(消盡)되었다.
부인 앨머의 우려도 노이로제만은 아니다. “남편이 출마하면 그를 죽이는 것이 국가적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비(非)육사 출신인 파월은 탁월한 ‘정치군인’이었다.
30대 초반부터 워싱턴 정가에 발을 들여놓았다. 1980년대를 전후해 국방부와 국가안보위원회의 핵심 멤버로 고속승진을 거듭한다. “그는 거미줄처럼 얽힌 정치구조와 군(軍) 사이에서 조화예술의 거장이었다.”
부시 가문은 최대의 후원자다. 1989년 ‘아버지 부시’에 의해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이 되었고, 그 10여년 뒤 ‘아들 부시’는 그를 흑인 최초의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부시의 가신(家臣)?
1963년 베트남전에서 지뢰를 밟고 죽어가는 병사를 품에 안고 지켜보았던 파월. 그는 조심스러운 전사(戰士)다. 군사 개입에 극도로 신중하다.
‘걸프전의 영웅’은 1991년에도 무력공격보다는 경제제재를 선호했다. “전쟁은 마지막 선택이어야 한다!”
그는 자신과 다른 세계관을 가진 팀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의 입지는 좁다. 그의 상호주의는 ‘체니-럼즈펠드-라이스’ 트로이카의 일방주의에 치이고 있다.
그러나 ‘애국심의 상징’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처신은 진중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그의 자제력은 놀랄 만하다.
정치 투쟁에 필요한 ‘열망과 정열’이 부족한 것인가. ‘백인도 좋아하는 흑인’의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인가.
그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포기했는지 모른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