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디 선데이’의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사실적인 연출과 맷 데이먼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 ‘본 슈프리머시’.-사진제공 UIP코리아
기억상실증에 걸린 전직 CIA 소속 킬러 제이슨 본(Jason Bourne·맷 데이먼). 추적자를 피해 연인 마리(프랭카 포텐테)와 도피하면서도 정작 쫓기는 이유를 모르는 그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반복되지만 뚜렷하지 않은 악몽은 누군가가 살해되는 현장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결국 마리가 살해되자 본은 복수를 위해 자신을 괴롭혀온 조직을 거꾸로 추적하기 시작한다. 여러 단서들을 모아 퍼즐을 맞춰가던 본은 자신이 러시아 하원의원 네스키 부부의 죽음과 관련돼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 ‘본 슈프리머시’(The Bourne Supremacy)는 2002년 개봉된 ‘본 아이덴티티’(The Bourne Identity)의 속편으로 액션 스릴러라는 장르 선택과 함께 나는 누구인가라는 킬러의 정체성 문제를 ‘두 얼굴’로 내세웠다.
이 작품은 ‘본 아이덴티티’의 연장선상에서 약간의 변주를 시도한다. 관전 포인트는 전편에 이어 같은 역을 맡은 맷 데이먼과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만남. 그린그래스 감독은 1972년 발생한 북아일랜드의 유혈사태를 다큐멘터리 기법에 담은 영화 ‘블러디 선데이’로 호평 받은 바 있다.
감독이 상업영화로서의 재미를 유지하면서도 애써 노력한 점은 킬러영화의 관습적 상상력으로부터의 탈피. 그가 효과적으로 사용한 ‘재료’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지적인 청년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데이먼의 이미지와 ‘킬러 딱지’를 붙이기에는 너무나 밋밋한 그의 얼굴이다. 데이먼은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본드 형의 느끼한 카리스마를 지니지도 않았고, 때로 스타일리시하게 과장돼온 다른 영화 속 킬러들과도 다르다. 전통적 킬러의 이미지를 배반한 그의 평범함은 관객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킬러영화가 아니라 ‘현실적인’ 사건을 지켜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핸드 헬드’(카메라 들고 찍기) 기법으로 촬영된 사실적인 화면과 심장박동처럼 들리는 비트 위주의 단순한 음악도 영화의 리얼리티를 높인다.
하지만 이 작품을 액션 스릴러라는 장르적 잣대로만 읽는다면 아쉬움이 남는다. 1시간 가깝게 사실적인 액션과 두뇌게임으로 관객을 빠르게 몰아세웠던 영화가 후반부 너무 쉽게 ‘비밀의 문’을 열어버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CIA 간부가 자신의 부하 직원을 살해하면서 사건의 실체가 공금횡령을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드러나자 긴장의 꼭짓점에서 한순간에 추락해 버린다.
이는 상업영화를 만들었지만 다큐멘터리 작가로 명성을 쌓은 그린그래스 감독이 포기하지 못한 ‘욕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억을 되찾은 본은 자신이 살해했던 하원의원 부부의 딸을 찾아가 진실을 고백한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인 게 아냐. 내가 (둘 다) 죽였어. 이제 세상이 좀 달라 보이지….”
20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 가.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