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일이다. 밤늦게 집에 가니 처가 투덜댄다. “어디 가서 뭘 했기에 70만원 내라는 고지서가 오느냐”는 거다. 한꺼번에 그만큼 쓸 일도 없고, 카드도 만들지 않은 나로서는 의아한 일이었지만 “정신없으니 내일 아침에 다시 보자”고 말하고 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출근을 서두르다 전날 밤 일이 생각나 그 종이쪼가리를 다시 본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70만원이 아니라 ‘0’이 3개 더 있는 7억원의 빚을 갚으라는 통고서였다. 형의 부탁으로 친구 분에게, 태어나 처음으로 인감을 만들어 연대보증을 서 준 것이 발단이었다.
이제 환경운동을 그만두고 돈을 벌어야 하나? 아는 선배를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다. 그런데 그 선배는 연방 껄껄 웃는다. “환경운동 하는 사람이 돈 없는 것은 뻔한 일인데 은행인들 어찌하겠느냐. 딴 고민 하지 말고 환경운동이나 열심히 하라.”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새삼 그간의 세월이 스쳐 갔다. 1990년 여름, 대학원 초년생이면서 환경연합의 전신인 공해추방운동연합 연구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나는 여름방학에 경기 안양지역의 환경 실태를 조사하며 악명 높은 안양천에 들어가 봤다. 짧은 장화를 넘어 발가락 사이로 파고 들어오는 거무튀튀한 물, 끝없이 밀려 내려오는 오물. 하마터면 먹은 것을 다 게워 낼 뻔하면서 환경오염을 체감했다.
1994년에는 낙동강 수돗물 악취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범인을 잡겠다고 대구로 출동했지만 좌절하고 말았다. 정부도 범인은 차치하고 악취 원인이 되는 물질조차 밝혀 내지 못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성과라면 낙동강 일대의 상수원과 수돗물 수질에 관한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단지 악취가 없었을 뿐 낙동강 일대의 수돗물은 거의 수년간 기준치를 초과하는, 못 먹을 물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좌절은 그 후에도 있었다. 2000년 겨울, 새만금 관련 토론회에 나갔을 때다. 새만금 갯벌매립 찬성측으로 나온 모 교수는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곳만은 살리자-새만금 갯벌’을 외치던 사람이었다. 변절한 학자, 그런 이가 내세우는 ‘사기 이론’이 국가정책으로 계속 추진된다는 것에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론 생각한다.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하나?” 하지만 나는 아직 환경운동을 그만두고 싶지 않다. 어떤 분들은 “먹고는 사느냐”고 걱정해 주기도 하지만, 1990년대 초 20만원이던 월급이 이제 다섯 배나 되니 여유롭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내게는 죽을 때까지 다 갚지 못할 빚이 있다. 1994년 낙동강 사태 때 주민들이 오염된 수돗물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건강이 환경오염 때문에 나빠지고 있다. 그걸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 의식이 빚으로 쌓인다. 그것은 짐이기도 하지만 나의 길을 흔들리지 않고 가게 만드는 중요한 동력이다.
▼약력▼
1965년 생. 서울대 농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시 수돗물수질평가위원, 환경부 환경보전위원, 서울시 지하철 환경위원이다.
양장일 서울환경연합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