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일 싱가포르의 한 고위 정치인이 대만을 비공식적으로 방문해 나흘 동안 천수이볜(陳水扁) 총통과 롄잔(連戰) 국민당 주석 등을 만나 상호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당연히 중국 정부가 발끈하고 나섰다. 중국 외교부는 나흘 뒤 성명을 내고 “싱가포르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위반했다”며 “이번 방문은 중국과 싱가포르 관계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이 모든 책임은 싱가포르에 있다”고 경고했다.
다시 사흘 뒤.
대만을 방문했던 싱가포르의 정치인은 기자회견을 열고 “싱가포르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한다. 하지만 국익을 토대로 원칙에 입각한 대외정책을 계속 펼쳐 나가겠다”고 뼈 있는 말을 던졌다. 리셴룽(李顯龍·52·사진) 당시 부총리였다.
중국의 엄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국제적인 실익을 챙기는 정치인. 그러기에 국민적 신뢰가 높은 정치인, 리 부총리가 12일 싱가포르의 3대 총리로 취임한다.
▽준비된 총리=리 신임 총리의 아버지는 ‘싱가포르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리콴유(李光耀·81) 초대 총리다.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황태자’ 수업을 받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수학과와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을 졸업해 학문적으로도 무장이 돼 있다. 1971년 싱가포르 군대에 입대한 뒤 고속 승진을 거듭, 준장을 달면서 군 인맥도 만들었다.
군을 제대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정치인 수업이 시작됐다. 32세에 아버지를 따라 집권 국민행동당(PAP)에 입당한 이후 6년 만인 1990년 부총리로 취임했다. 이어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까지 겸임했다.
신임 총리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매우 높다. 스트레이츠 타임스가 최근 15세 이상 싱가포르 국민 4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조사 결과 응답자의 83%가 그를 차기 총리감으로 꼽았다.
신뢰의 바탕에는 그의 경제적 업적이 있다. 리 신임 총리는 싱가포르가 1997∼98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끈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올 2·4분기(4∼6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2.5%. 몇 년째 10% 안팎의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것도 그의 업적으로 꼽힌다.
▽리셴룽 시대의 과제=하지만 ‘리콴유의 아들’이란 이미지를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65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줄곧 PAP가 집권하면서 리 신임 총리는 아버지의 음덕으로 손쉽게 총리직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만큼 ‘부자 세습’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리 신임 총리는 아버지와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아버지 리 총리가 ‘깨끗한 싱가포르’를 국가 과제로 내걸고 엄격한 통제 정치를 펼친 데 비해 리 신임 총리는 ‘폭넓은 자유를 향유하는 싱가포르’를 새 시대의 모토로 내세우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아시아 허브 기능을 공고히 하는 임무를 안고 있다. 싱가포르의 허브 기능은 중국, 인도, 홍콩 등지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