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대학병원 혈액클리닉 홈페이지(http://blood.snuh.org) 게시판에는 최근 AB형 혈액형이 더럽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O형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묻는 고등학생의 게시물이 실렸다. 피를 바꾸기 위해 다른 형의 피를 먹었다는 괴담도 있다.
#2. 케이블 채널인 JEI스스로방송은 올해 6월과 7월 일본의 유명한 혈액형 연구가인 노미 도시타카를 초청해 ‘혈액형으로 아이 성적 100% 올리기’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해 6회 연속 방영했다. 이 방송이 나간 뒤 “AB형은 충분한 수면이 필요하대요. 전 애들이 졸면 핀잔만 주었는데…”, “더디고 느리다 했던 A형들이 결국은 할 일들을 모두 다 한다더라고요”라고 털어놓는 주부들의 게시물이 잇따랐다.
#3. 대학생 김광수씨(25)의 과 여자 동기가 어느 날 자신의 MSN 메신저 대화명을 ‘B형만 아니면 다 돼!’로 바꿨다. 김씨가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웬 B형?” 그 친구의 대답인즉 “이제까지 내가 만난 남자들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B형이었어.”
청소년 또는 여성용 잡지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던 것으로만 여겨졌던 혈액형이 최근 1, 2년 사이에 우리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혈액형에 관련된 저서만 만화를 포함해 30종이 넘게 나왔고, 혈액형별 유아교육, 궁합, 옷차림, 다이어트, 차(茶), 향수, 속옷까지 등장했다.
젊은이들은 인터넷 블로그나 싸이월드를 통해 혈액형과 인간 성격에 관한 온갖 담론을 전파한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에는 혈액형 관련 카페가 200개, 회원 수가 많은 것은 6만 명에 달한다. 1999년 번역 출간된 일본 책 ‘혈액형 인간학’(동서고금)은 지금까지 7쇄를 찍었고 최근 1년간 판매량이 그 전 해보다 2배 정도 늘었다.
혈액형이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
혈액형에 따른 성격 분류는 가능한 것인가. 대한적십자 중앙혈액원에서 한 연구원이 혈액 샘플을 검사하고 있다. 강병기기자
○ 피는 못 속인다(?)
한 영화제작자는 직원을 채용할 때 꼭 혈액형을 묻는다. 물론 혈액형을 가려서 뽑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그냥 특정 혈액형 남자랑 안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피는 못 속인다”고 말한다.
서울의 중견기업체인 H사도 사원을 뽑을 때 이력서에 혈액형을 쓰게끔 한다. H사의 인재개발팀 관계자는 “혈액형이 인성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특별히 회사가 선호하는 혈액형은 없다. 다만 지원자가 어떤 스타일의 사람인지 파악하자는 차원에서 한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심심풀이 삼아 혈액형으로 인간의 성격과 행동을 파악하는 차원을 좀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혈액형과 성격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설이 신빙성을 얻어 가는 것일까.
영화사 제니스 엔터테인먼트는 올해 9월 ‘B형 남자’라는 영화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B형인 감독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기처럼 쓴 글에서 힌트를 얻어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는 B형 남자가 A형 여자를 만나 좌충우돌하는 로맨틱 코미디.
이 영화사 김영심 기획실장은 “인터넷의 혈액형 유형별 분류가 꾸준한 인기를 얻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 사람들은 혈액형 이야기를 잘 믿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귀를 기울인다”고 말했다.
산부인과 의사 김창규씨는 의사로서는 드물게 혈액형과 인간 질병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그는 환자들의 혈액형을 조사해 병명과 함께 데이터 베이스화 하고 있다.
“O형은 십이지장궤양, A형은 위궤양, B형은 심장병, AB형은 폐암에 잘 걸린다. 물론 혈액형과 인간의 성격이 연관된 것인지 그 의학적인 근거는 아직 찾지 못했다. 통계학적으로 분석한 결과일 뿐 더 명확한 인과관계는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혈액형과 인간형의 연관 관계를 믿고 있다.
혈액형 검사용 키트.
○ ‘혈액형 인간학’의 역사
1901년 오스트리아 빈 병리학 연구소에서 연구 조교로 일하던 세균학자 칼 란트슈타이너가 혈액에 A, B, C형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듬해 그의 동료 두 명이 나머지 AB형도 찾아냈다. 이로써 수혈이 가능해졌고 란트슈타이너는 1930년 노벨 의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몇 년 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의 에밀 폰 둥게른 박사는 ‘혈액형의 인류학’이라는 논문에서 혈액형에 따른 인종 우열 이론을 폈다. 더러워지지 않은 순수 유럽민족, 즉 게르만민족의 피가 A형이고 그 대척점에 있는 B형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아시아 인종에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주장은 뒤에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1927년 일본의 다케지 후루카와라는 철학 강사가 ‘혈액형을 통한 기질 연구’라는 논문에서 처음으로 혈액형과 인간의 성격을 나눴다. 놀랍게도 그의 분류는 지금의 혈액형 분류와 거의 다른 점이 없다. 당시 일본의 선정적 언론 보도와 라디오 프로를 통해 그의 이론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이론에 따라 1930년대 처음으로 이력서에 혈액형 칸이 생겼다. 고용될 사람이 어느 정도 회사에 적응할 것인지를 미리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1937년 외무성 관련 업무를 하던 한 의사는 O형인 사람이 더 훌륭한 외교관이 될 수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2차 대전 중에는 일본 육군과 해군이 병사들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는 정보를 믿고 그들을 혈액형별로 나눴다는 소문이 돌았다.
2차 대전을 치른 뒤 잠시 소강상태를 거치다 1970년대 저널리스트 노미 마사히코에 의해 다시 불붙었다. 그가 쓴 ‘혈액형 인간학’이라는 책은 이후 200쇄를 찍으며 지금까지 수백만 부가 팔려 나갔다.
그가 1981년 강연 도중 사망한 뒤, 그의 아들 노미 도시타카가 영어로 펴낸 ‘혈액형이 당신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You are your blood type)’는 책은 90년대 이후 자연치료 의학계의 성서로 여겨지기도 했다.
국가별로 보면 한국과 일본 프랑스에는 A형이, 중국과 미국 영국은 O형이 가장 많은 편. 혈액형에 따라 민족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지만 모든 민족을 4가지로 분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다.
혈액형 붐을 거친 일본에서는 혈액형 껌, 음료수, 달력은 물론이고 콘돔까지 나왔다. 혈액형에 따라 원생들을 나눠서 가르치는 방법을 달리하는 유치원이 생겼고 결혼중매업체에 등록한 남녀의 가장 중요한 목록이 바로 혈액형이었다.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혈액 속 적혈구와 백혈구.
○ 왜 지금 혈액형인가
국가별로 보면 한국과 일본 프랑스에는 A형이, 중국과 미국 영국은 O형이 가장 많다. 그렇다면 혈액형에 따라 그 나라의 민족성까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 각국을 그 나라 역사나 지정학적 위치 등을 무시하고 4종류 밖에 안 되는 혈액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혈액형에 집착하는가.
우리보다 먼저 혈액형 붐을 맞았던 일본에서는 80년대 왜 사람들이 혈액형 분류법을 믿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가 활발했다.
일본기독여대 심리학과 안도 기요시 교수는 과학적 기반이 없는 혈액형 인간학도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혈액형 인간학을 믿는 사람들은 무리에 가입하고 복종하기를 더 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따라서 혈액형은 한 사회에 속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쉽게 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일본대 심리학과 오무라 마사오 교수는 사람들이 혈액형 인간학을 믿는 이유가 ‘FBI 효과’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성격은 원래 규격화할 수 없지만(Free-size), 한번 이름 붙여지면(Branded), 마음에 새겨진다(Imprinted)는 것. 이것이 반복되면 결국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국내 한 여성 잡지의 문화담당 에디터 이규창씨는 최근 ‘나의 혈액형을 위한 변명’이라는 글에서 우연히 한 모임에서 만나 즐겁게 시간을 보낸 여성에게 자신이 B형이라고 말하자 그 여성이 보인 반응을 썼다. “그 여성은 갑자기 말을 하지 않더니 나를 경계하는 빛까지 띠었다. 굉장히 당황했다.”
그는 “B형은 바람둥이라는 식의 분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과학적 근거도 없이 함부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도구로 삼아서는 곤란하다”고 항변했다.
그는 미국이나 유럽처럼 자연스럽게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한국 또는 일본 사람들이 상대방을 해석할 수 있는 도구를 혈액형에서 찾는 것은 아닐까 추정했다.
중앙대 심리학과 김재휘 교수는 이런 현상을 “사람들은 세상을 해석하는 어떤 원리를 찾고 싶어 한다. 이때 가장 쉬운 방법이 이분법 또는 모든 것을 범주화시키는 것이다. 딱 좋은 것이 혈액형이다. 혈액형은 4가지로 분류되고 모든 사람이 거기에 속한다. 관계를 알기 쉽고 검증하기도 쉽다.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사람들은 그것에 의존하고 싶어 한다”고 해석했다.
김 교수는 또 “블로그나 싸이월드 같은 인터넷 의사소통이 유행하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혈액형”이라고 덧붙였다.
글=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그래픽=정인성기자 71jis@donga.com
이 기사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고경범(고려대 불문과 4년), 양승은(고려대 영문과 4년), 이기정(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4년), 이민규(충남대 경영학과 4년), 조국희씨(이화여대 국문과 4년)도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