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난 누구예요/백승종 지음/270쪽 8000원 궁리
“모범 답안을 외운 듯한 천편일률적인 글이 많았다.”
매년 논술 채점 교수들의 총평에서 빠지지 않는 문구다. 논술 준비생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개성 있게 쓰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답안은 진부한 논거와 뻔한 결론으로 이루어진 글이 되기 십상이다. 왜 그럴까?
“세대간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논제를 예로 들어 보자. 추상적으로 주제에 접근한다면 결론은 “서로를 존중하고 대화로 문제를 푼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래서는 ‘천편일률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특색 있게 쓰려면 체험에 기초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논제를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미숙한 학생들이 이러한 논술의 황금률을 따르기란 쉽지 않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아버지, 난 누구예요’를 권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 책은 평범한 대학생들이 쓴 자신과 주변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다. 흔히 역사서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용어로 가득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평범한 일상의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논의의 깊이는 결코 얕지 않다.
책의 한 꼭지인 ‘교사 홍태남의 교통수단 변천사’를 보자. 1970년대 초반, 자전거로 시작한 아버지의 탈 것은 80년대 80cc 오토바이를 거쳐 90년대 초에는 1500cc 자가용으로, 몇 년 뒤에는 가족용 밴(van)으로 바뀌어 간다. 필자는 이런 사실을 기초로 탈 것에 얽힌 가족사를 담담하게 펼쳐 보인다. 유신헌법의 필요성을 주민들에게 알리라는 공문을 받은 아버지가 자전거로 산길을 돌며 강연을 하고 끝나면 촌로들과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던 모습, 어머니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장터로 향하는 장면, 자동차 보급이 보편화 되자 대형할인점이 생겨 동네 시장에는 발길을 멀리하게 된 사연이 나온다.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들이지만 ‘교통과 도시발전’ ‘유신독재와 민중’ 등의 추상적인 용어를 쓸 때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글이 읽힌다. 역사적 문제의식과 일상이 자연스레 하나로 합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이 책에는 회사원 아버지의 내 집 마련, 자신이 겪은 삼풍백화점 붕괴, 심지어 자신의 연애 변천사까지 다양한 주제의 ‘역사 기록’들이 저마다의 관점으로 펼쳐져 있다. 이론은 현실에 적용 가능할 때 유용하다. 거꾸로,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이론은 위험하다. 그래서 공부하는 이들은 이 둘을 조화시킬 줄 알아야 한다. 논술고사에서 체험에 기초한 문제 분석에 높은 점수를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버지, 난 누구예요’를 읽으면서 학생들은 이론과 현실의 조화에 대한 감(感)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안광복 서울 중동고 철학교사·학교도서관 총괄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