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바꾼 원폭투하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미군 B-29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떨어뜨렸다. 단 한 개의 폭탄으로 히로시마 주민 34만명의 절반이 넘는 20만명이 숨졌다. 인류는 미증유의 가공할 위력과 참혹한 결과에 경악했다. 사진은 원폭 투하 5분 후 히로시마 상공 1700m까지 피어오른 버섯구름.- 출처는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서문당).
《내년 8월 15일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60주년이면서 우리 민족의 광복과 분단 60주년입니다. 이에 본보는 파란만장했던 전후사(戰後史) 60년, 분단사 60년을 이미 알려진 자료와 최근 발굴된 자료들을 두루 살피면서 쟁점별로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우선 학계와 지식인 사회에서 쟁점이 제기되고 있는, 광복의 그날부터 6·25전쟁 직전까지의 광복 5년사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1946년 7월 3일 평양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청사에서 ‘각도(各道) 보안부장 회의’가 비공개리에 열렸다. 도의 보안부장이라면 요즘 우리 식으로 치면 도의 경찰청장에 기무부대장을 겸한 자리인 만큼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회의에서 사회를 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 최용건은 김일성의 최측근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의 실세는 최용건이 아니라 소련군의 대령이었다. 점령지인 북한의 공안을 담당한 니콜라이 자구루진이 바로 그 사람. 회의록에 따르면 자구루진은 이것저것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나무랄 것은 나무라면서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소련 점령군이 해방된 북한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은 사례다.
●‘미국이 해방시켰다’고 하면 불경죄
北 상륙 소련군
1945년 8월 21일 원산항에 상륙한 소련군.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자 재빨리 대부대를 북한에 진주시켜 친소정권 수립을 꾀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그날 회의에서 황해도 보안부장 차용제의 보고가 특히 관심을 끌었다. 관내의 보안요원들을 심사해 6명의 서장을 비롯해 1274명의 흑색분자를 숙청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자구루진은 “잘한 일”이라며 “보안기관 내부의 불순분자를 빠른 시일 안에 완전히 없애라”고 지시했다.
황해도는 이승만과 김구의 출생지인 데다가 그때만 해도 남한과의 왕래가 비교적 쉬웠다. 따라서 남쪽의 영향을 받아 다른 지역보다 반공운동이 활발했다. 소련점령군과 김일성 집단은 바로 여기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사람들을 포함해 마음에 들지 않는 보안요원들을 대대적으로 제거한 것이었다.
반동분자로 숙청된 벽성군 장곡면 보안지서장의 경우가 당시 북한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일제가 패망한 것은 소련군이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가 구속됐다.
해방된 지 1년 가까이 지나 일제가 왜 패망했는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지만 북한에서 그걸 드러내놓고 말하면 소련군에 대한 ‘불경죄’가 됐다. “일본이 항복한 것은 전적으로 소련이 일본을 상대로 개전했기 때문이며 북한이 해방된 것도 소련 덕분”이라는 소련점령군의 공식 설명이 금과옥조였기 때문이다.
●빨치산을 대단치 않게 여긴 소련군
일본이 항복하면서 서방세계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그 공을 미국의 원폭투하에 돌리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그러자 소련군의 기관지 ‘붉은 별’은 1945년 8월 18일 “소련의 대일(對日) 개전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았어도 태평양전쟁의 종결을 촉진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라고 반박했다.
이러한 소련군의 시각에서 볼 때 김일성과 최용건을 비롯한 조선인 빨치산세력의 공로는 대단치 않았다. 대일전쟁을 지휘했던 소련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리에프스키 원수는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세력은 거기에 저항하는 조선의 애국자들에게 너무나 컸다”며 조선인들의 빨치산운동을 사실상 무시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의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제프 소장은 “조선 인민의 힘만으로는 일제를 추방할 수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그때만 해도 소련군의 공식 해석을 충실히 따랐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했던 기간에 김일성이 행한 연설들은 예외 없이 소련의 참전으로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됐음을 강조하면서 “소련군의 영예스러운 공적을 자자손손 기억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뒷날 그는 자신의 연설문집에서 그러한 표현을 모두 없애고 자신이 창설한 ‘조선인민혁명군’이 일본군을 패퇴시켰고 조선을 해방시켰다고 변개(變改)한다.
日 항복서명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대표인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45년 봄, 日蘇간의 은밀한 거래
소련은 왜 그렇게 주장했을까? 한마디로 일본과 조선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북한에 친소(親蘇)정권을 세우겠다고 요구할 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실제로 무엇이 일제의 항복을 앞당겼나? 미국은 자신의 원폭투하가, 소련은 자신의 대일참전이 일제의 항복을 결정적으로 앞당겼다고 주장하는데, 어느 주장이 맞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항복하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는 아무리 늦게 잡는다고 해도 이미 1945년 4월 하순과 5월 초순 사이에 종전을 결정하고 스웨덴 포르투갈 스위스 정부와 로마교황청 등을 통해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화평공작’을 전개했다. 소련에도 중재에 나서줄 것을 은밀하게 부탁했다.
일본 정부의 이러한 시도는 미국의 해리 트루먼 행정부를 긴장시켰다. 만일 소련의 중재로 평화협상이 성공한다면 소련과 일본 사이에 밀월관계가 성립될 것이고,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엄청나게 확대시킬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루먼 행정부는 일본정부의 화평공작을 막으면서 하루빨리 일본의 항복을 받으려고 결심했다. 말하자면 일본과의 전쟁에서 ‘단독 플레이 완승’을 거두고자 한 것이었다.
●‘화평공작’으로 늦어진 일본의 항복
마침 그해 7월 15일 미국의 과학자들이 원폭실험에 성공했다. 트루먼은 미국이 ‘새 무기’를 개발한 사실을 7월 24일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알려주면서 “일본이 곧 항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새 무기를 일주일 안에 일본을 상대로 쓰겠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트루먼이 말하는 ‘새 무기’가 원폭임을 금세 알아챘다. 미국에 심어둔 소련의 고급첩자들에게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8월 6일과 8일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다. 소련이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158만명 규모의 극동군을 발동한 것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때로부터 꼭 12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 무렵인 8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 사이에 일본 국왕 히로히토는 궁중방공호에서 최고전쟁지도회의를 열고 항복을 결정한 뒤 곧바로 중립국들을 통해 또는 직접적으로 미국과 소련에 그 사실을 알렸다.
이미 종전을 추구하던 일본 정부의 항복을 최종적으로 이끌어낸 것은 미국의 원폭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해 소련군의 참전이 없었어도 일본은 항복했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소련군의 북한 점령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련은 겨우 일주일을 싸우고 한반도의 북반부를 포함해 동북아시아의 많은 영토를 획득한 셈이 됐다. 그리고 일본은 화평공작에 미련을 둔 채 항복을 늦춰 결과적으로 한민족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친 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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