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동맹국인 미국보다 중국을 중시해 왔던 여권의 일부 386세대 의원 가운데서도 중국의 패권주의 행태를 우려하는 소리가 들린다.
중국의 ‘역사 훔치기’에 대해 충격과 분노가 큰 것은 그동안 중국을 위협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우방인 양 여겨왔던 순진한 믿음이 여지없이 깨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중국이 대국이라지만 경제와 사회 발전 수준에선 전반적으로 아직 한국에 미치지 못한다는 섣부른 생각이 우리를 우쭐하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중국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온 조선족의 곤궁한 모습과 중국의 ‘한류(韓流)’ 열풍도 대중(對中) 착시현상을 심화시키는 데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국이 오래전부터 주도면밀히 추진해 온 동북공정(東北工程)의 문제점이 제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요즘 축구경기장에서 중국 관중이 분출하는 반한(反韓) 반일(反日)감정 등 내셔널리즘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한 채 그저 한심스러운 일로 치부하고 말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중국의 팽창주의와 한반도에 대한 뿌리 깊은 우월감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늘 그래왔다. 역사 왜곡마저 서슴지 않는 중국이 개탄스럽지만 그런 중국의 위협을 어느새 잊어버린 우리의 역사 망각도 이해하기 어렵다.
한중관계사는 중국과의 국력차에 따른 통절한 아픔으로 점철돼 있다. 조선은 심지어 국호조차 마음대로 정하지 못했다. 1392년 이성계(李成桂)는 명나라에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을 국호로 제시하고 명나라의 선택을 받아들여야 했다.
조선에 온 명·청의 사신이 중국 황제의 칙서를 낭독하면 왕은 꿇어앉아 이를 들어야 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피신했던 인조가 결국 1637년 1월 송파의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큰절을 하고, 절을 할 때마다 머리를 세 번씩 땅에 부딪히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써 치욕적인 항복을 한 것은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당시 역사를 기록한 책엔 조상들의 처절한 고통과 피눈물이 갈피마다 배어 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조미수호통상조규’를 체결할 때 청나라는 조선이 속방(屬邦)임을 주장했다. 그때 미국이 이를 일축하고 조선의 자주성을 인정해 평등조약을 체결한 것은 엄연한 사실(史實)이다.
광복절과 3·1절, 학생의 날 등 한국의 국경일과 기념일 중 일본과 관련된 것은 여럿이지만 왠지 중국에 관한 것은 없다. 일본으로부터는 식민통치와 임진왜란 등을 겪었지만 역사적으로 중국에 당한 것은 그 이상으로 혹독하다. 그럼에도 극일(克日)을 부르짖듯 극중(克中)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의아하다. 수교(1992년) 후 비교적 무난했던 12년간의 한중 우호로 잊어버리기엔 지난 역사가 너무 쓰라리지 않은가.
중국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경제성장과 북한핵 문제의 해결 등을 위해 중국과의 협력이 필수적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이 꿈꾸는 ‘중화(中華)의 세기’가 ‘중화(中禍)’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환상을 접고 중국을 직시해야 한다.
한기흥 정치부차장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