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린 오티
‘국적?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남자 육상의 스프린터 말라치 데이비스. 영국 유니폼을 입었지만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인근에서 태어나 자란 흑인선수로 지난달까지 단 한번도 영국 땅을 밟아 본 적이 없다.
멀린 오티(44). 슬로베니아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했는데 낯이 익다. 알고 보니 자메이카 출신으로 이미 6차례나 올림픽에 출전해 8개의 은, 동메달을 획득한 여자 스프린터.
아테네 올림픽 개최국 그리스는 어떨까. 야구 대표팀 가운데 1명을 빼고는 모두 미국 혹은 캐나다 출신이다.
아테네 올림픽에는 이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올림픽 규정의 틈새를 이용해 다른 나라 국기를 달고 뛰는 ‘출전국 스와퍼’들이 수십 명에 이른다.
일부는 가난을 피해 더 훌륭한 코치와 시설, 새집을 찾아 출전국을 바꿨고 일부는 경쟁이 덜 치열한 나라에서 선수로 선발되기 위해 부모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태어난 나라로 옮겨갔다.
자메이카 출신인 오티는 1998년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로 이주해 시민권을 획득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전 국적으로 국제대회에 출전한 뒤 3년이 지나면 새로운 국적으로 출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오티는 2000년 시드니 대회 때는 자메이카 국적으로 출전해 계주에서 은메달을 땄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슬로베니아 국적으로 나선 것.
쿠바 출신의 삼단뛰기 선수인 야밀 알다마도 시드니 올림픽까지 4차례나 쿠바 대표로 출전했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수단 선수로 출전한다. 2001년부터 영국에서 살았으나 시민권을 받기가 까다로워 고민 끝에 국적을 쉽게 주는 수단을 택했다.
반면 남자 400m, 1600m에 출전하는 데이비스는 미국 대표선발전 통과가 어려워 보이자 런던 태생의 어머니 덕에 7월 영국 여권을 받아 올림픽 팀에 합류한 경우다. 이전에는 국제 대회에 출전한 적이 없기 때문에 IOC 출전 규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틈새를 이용했다.그리스 야구대표팀에 포진해 있는 미국, 캐나다 출신 선수들도 모두 같은 경우.
‘국적 스와핑’은 90년대 초 구소련 체제가 붕괴되자 세계정상급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조건이 더 좋은 나라를 찾아 이주하면서 생겼다. 최근에는 카타르 바레인 등 중동의 부자 나라들이 높은 연봉을 내세워 가난한 나라의 일류 선수들을 불러들이면서 더욱 확산되고 있다.
케냐 출신으로 남자 3000m 장애물에서 금메달이 유력시되는 스티븐 체로노는 카타르 대표로 출전하면서 이름을 사이프 사에드 샤힌으로 바꿨다. 케냐가 그의 이적에 제동을 걸자 카타르는 ‘오일머니’의 위력을 과시하듯 체로노의 고향 엘도레트에 경기장을 지어주기로 약속했다. 체로노는 평생 카타르 정부로부터 매달 1000달러를 지급받는다.
지난해 파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에선 케냐 출신 선수 10여명이 다른 국적으로 출전한 일도 있다.
국적 스와핑이 확산되자 IOC의 자크 로게 위원장은 “엄청난 인센티브로 선수를 꾀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여권을 내주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라고 비판했다.
쿠바의 스포츠 영웅인 알베르토 후안토레나는 자국의 재능 있는 선수들이 부자 나라로 떠나는 것을 겨냥해 “스포츠 매춘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꼬기도 했다.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육상선수인 졸라 버드는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징계 조치로 남아공이 IOC에서 축출돼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자 할아버지 나라인 영국에서 새로 국적을 얻어 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한 예가 있다.
국적 스와핑의 부도덕론에 대해 일부에선 ‘스포츠를 행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이다’ ‘올림픽 경기는 국가간 경기가 아니라 개인들 간의 경쟁이다’라는 올림픽 헌장을 내세워 ‘국적 스와핑’을 정당한 권리로 옹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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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기자 kim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