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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죽었다고? 해박한 지식+빠른 글+깊이=인기

입력 | 2004-08-16 18:43:00


소설이 죽었는가, 아니면 소설가가 죽었는가.

‘픽션의 시대가 갔다’고 하지만 요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한국 문단은 소설이 죽은 게 아니라 소설가가 죽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8월 첫째 주 베스트셀러목록(한국출판인회의 집계)에서 '연금술사'(파울로 코엘료)가 11주 연속 1위이며 ‘다빈치 코드’(댄 브라운)가 2위, ‘11분’(코엘료)이 3위다. 14위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카타야마 쿄이치), 15위 ‘나무’(베르나르 베르베르)이며 한국소설로는 ‘칼의 노래’(김훈)가 17위로 고군분투중이다. 최근 잘 팔리는 소설들은 독서시장의 주역들이 20세기적 문자(文字)문화의 주역들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적 경험과 소통구조를 갖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과연 이들은 어떤 소설에 매료되는가. 베스트셀러 소설들의 인기비결을 작법(作法)중심으로 살펴본다.

● 인문 스릴러가 뜬다

인문학이 죽었다고 하지만, 인문에도 추리와 교양(정보)을 넣으면 잘 팔린다. 대표적 작품이 ‘다빈치 코드’와 ‘나무’.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장 살해사건으로 시작하는 ‘다빈치 코드’는 명화에 숨겨진 단서들을 숨 가쁘게 추적하며 사건 배후에 도사린 가톨릭과 비밀 종교집단 간의 음모와 알력을 기둥 줄거리로 한다.

이 책은 그동안 로빈 쿡의 의학 스릴러, 스티븐 킹의 호러 스릴러, 존 그리샴의 법정 스릴러와는 또 다른 ‘인문 스릴러’로 불린다. 최근에 나온 ‘단테클럽’(매튜 펄)이나 ‘자본론 범죄’(칼 마르크스)도 같은 성격의 책들이다.

한편, ‘나무’는 시간여행 복제인간 로봇이 등장하고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유전공학 등의 지식이 결합돼 퓨전 인문학적 글쓰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 글(텍스트)을 버려라

짧으면서도 쉬운 문장, 속도 빠른 문체에다 독자들에게 이미지까지 떠올리게 하면 금상첨화다. 대표적인 것이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들. 시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문체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평이다. 그의 책들은 모두 한 손에 쥘 수 있는 B6(가로 132mm, 세로193mm) 판형의 양장본으로 제본됐으며 페이지 수도 270∼300여 쪽에 불과하다.

최근 소설들이 이미지적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도서평론가 이권우씨는 “‘다빈치 코드’는 마치 시나리오 같다. 박진감 있고 흡인력 있는 전개에 복잡하게 복선을 깔아 놓지 않으면서 간혹 뒤통수를 치는 전개가 단순하면서도 만만치 않다”고 평했다. 주부 허영아씨(30·경기 안양시)는 “‘다빈치 코드’를 읽으면서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연금술사’를 읽으면서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같은 회화적 이미지를 떠 올렸다”고 말했다.

● 감정과잉이나 계몽은 금물

문학평론가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는 최근 한 계간지에서 우리 소설의 한계를 △경험의 강요 △감정의 범람 △계몽의 억압이라고 지적했다. 외국 작가들의 베스트셀러 소설들은 이와 정반대로 △경험이 아닌 상상력 △감정의 절제 △겸손한 글쓰기가 장점이라는 게 문단의 평가다. 대표적으로 일본작가 에쿠니 가오리, 쓰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사이’가 꼽힌다. 사랑을 다루면서도 상대를 옭아매거나 집착하지 않고 절제하는 감정처리가, ‘쿨’한 것을 좋아하는 현대 젊은이들의 정서와 맞는다는 것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역시 눈높이를 낮춘 글쓰기로 꼽힌다.

● 순수하되 깊이 있는 글쓰기

물질 만능주의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순수와 복고를 선호하는 것은 소설에서도 마찬가지. ‘진정한 보물은 세상의 영혼과 닿을 수 있는 궁극적인 사랑’이라고 말하는 코엘료의 ‘연금술사’나 섹스가 영성(靈性)에 이르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그려낸 ‘11분’의 메시지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제공해 준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