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과거사(史)인 노무현 정부 1년반 동안 대통령은 나라를 어디로 이끌고자 했던가. 국민 앞에 했던 연설들을 다시 읽어 본다.
취임사에선 ‘21세기 동북아시대 중심국가로의 웅비’를 벅찬 가슴으로 웅변했다. ‘국민통합’이 가장 중요한 숙제라 했고 ‘각 분야의 새로운 성장 동력 창출’도 역설했다. 미룰 수 없는 과제로 ‘수도권 집중 해소와 국가 균형발전’을 꼽았지만 행정수도(首都) 건설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
정부가 행정수도 건설이 아닌 600년 만의 천도(遷都)를 계획해 왔음이 드러난 것은 그로부터 1년4개월이 경과한 올 6월이다. 이때 대통령은 “수도 이전에 명운과 진퇴를 걸자”고 내각을 독려했다.
▼‘미래와 희망’으로 채웠던 웅변들▼
지난해 3·1절 기념사의 화두는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었다. “내부에 분열과 반목이 있으면 세계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국권까지 상실했던 100년 전의 실패가 되풀이될 수도 있다.” 이제 아픔의 근·현대사는 참여정부 출범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고 대통령은 선언했다.
이어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선 10년 안에 이룰 두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국민소득 2만달러’와 ‘자주국방 토대 구축’이었다. 경제의 성공 없이는 다른 성공도 어렵다며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보다 넉넉하고 안정된 세상에서, 제 나라와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저마다의 꿈을 자유롭게 펼치며, 당당하게 세계질서에 참여하고 주도하는 국민으로 살게 하자.”
국군의 날 경축연에선 즉석연설을 했다. “대한민국 국군의 명예를 반드시 지키고, 보람 있는 군대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 국민을 위해선 무한한 충성을 요구하겠지만, 정권을 위한 충성은 요구하지 않겠다.” 이튿날, 노인의 날 기념식에도 참석해 “고령화사회 대책은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라며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정상적 사회운영마저 불가능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10월 중순 정기국회 시정연설에선 자신의 재신임문제로 시끄럽던 상황임에도 송두율 교수에 대한 ‘폭넓은 화해와 포용’을 호소하기를 잊지 않았다. “대결과 불신과 증오의 시대가 아니라 민족간의 화합과 포용을 말하는 시대가 됐으니 이런 시대정신으로 한국사회의 여유와 포용력을 세계에 보여 주자”는 주문이었다. 그로부터 열 달 뒤인 이달 초 대통령은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 상황인데 무조건 포용하라는 얘기는 그대로 현상을 유지하라는 것”이라며 각계의 포용 권고에 선을 그었다.
대통령이 “가장 기본적인 인권은 생존을 위협받지 않을 권리”라고 한 것은 작년 12월 세계인권선언 기념일 연설에서다. 경제가 무너지면 많은 국민은 생존을 위협받는다.
올해 첫 기자회견 모두(冒頭) 연설에서 대통령은 “국민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세계 일류국가를 향해 흔들림 없이 전진하자”고 강조했다. 또 “최고의 복지요, 가장 효과적인 소득분배 방안인 일자리 창출에 정책의 최우선을 두겠다”며 이를 위해 규제 완화와 투자환경 개선에 힘쓰겠다고 다짐했다.
▼初心은 증발했나, 말뿐이었나▼
5개월 전 3·1절 기념사에선 “적어도 지도자 수준에서 우리 국민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 강행 발언에 일침을 놓았다. 그 대신 국민에겐 “항일과 친일, 그리고 좌우 대립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용서와 화해의 지혜를 만들어 가자”고 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지난달 말 고이즈미 총리에게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반면 그제 광복절 경축사는 경제와 민생문제를 뒤로 한 채 ‘국내에서의 친일청산과 공권력 과거사 청산’ 독전(督戰)으로 가득 찼다.
국민의 힘을 하나로 엮어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던 대통령의 초심(初心)은 증발했나. 올 광복절 이전의 연설은 애당초 정치적 수사(修辭)였을 뿐인가. 아니라면, 남은 임기 3년반은 미래만을 향해 달려도 결코 길지 않다. 1년반 동안의 대통령 연설들을 본인과 국민이 함께 되짚어 보길 권하고 싶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