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지난 주말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친지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신부가 미국 사람이라는 점만 빼고는 여느 결혼식과 다르지 않았다. 여기저기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는 하객들, 접수대에 축의금 봉투를 내는 행렬….
식이 시작돼 신랑 신부 입장이 끝났는데 갑자기 사회자가 장학금 전달식을 하겠단다. 결혼식에서 웬 장학금 전달식? 경험이 부족한 사회자가 말실수를 했나보다 하며 의아해 하는데 혼주가 나가더니 마이크를 잡는다. “여러분이 오늘 내신 축의금 전액을 ○○장학회에 기부하겠다.” 혼주는 그 자리에서 그 장학회 관계자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하객들은 혼주의 돌출 행동에 놀라면서도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장학회와 혼주 사이에는 애틋한 사연이 있었다. 20여년 전 한 청년이 대학의 같은 학과 친구들과 함께 낚시를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친구들을 무척 사랑했던 꿈 많던 젊은이였다고 한다. 청년의 부모는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서울의 사업을 모두 정리해 시골로 내려가 젖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가족, 친구들과 함께 죽은 아들을 기리는 작은 장학회를 만들었다. 이 장학회는 지난 20여년간 아들의 모교 재학생 중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 70여명에게 학비를 지원해 왔다.
이날 결혼식의 혼주는 20여년 전 숨진 청년의 친형이었다. 결국 조카의 결혼축의금이 삼촌을 추념하는 장학회에 기증된 셈이다. 결혼식에 앞서 열린 가족회의에서 축의금을 보람 있게 쓸 방법이 없을까 논의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드라마가 또 있을까. 여러 결혼식에 다녀봤지만 축의금을 낸 뒤 이렇게 가슴이 뿌듯해보긴 처음이었다. 메마른 세태에 잔잔한 감동을 가득 안겨준 매우 뜻 깊은 결혼식이었다.
백형찬 서울예술대 교수·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