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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시절 징병기피자 찾아다녀"

입력 | 2004-08-16 23:23:00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선친 신상묵씨가 1940년 11월 8일 일본군 지원병 수료생 자격으로 반도호텔에서 열린 좌담회에 참석했던 내용을 실은 1940년 11월 ‘매일신보’. /사진제공 신동아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 부친 신상묵(辛相默)씨는 1933년 대구사범학교(경북대 사범대 전신)에 5기생으로 입학했다.

대구사범 졸업생들의 인적 사항과 행적을 자세히 기록한 ‘대구사범심상(尋常·‘보통’이란 뜻)과지(誌)’는 신상묵씨의 학창생활에 대해 “5기생들에게 학창시절 가장 지긋지긋했던 기억으로는 아무래도 교련시간, 검도시간을 들 수 있다. 황윤주가 대대장이요, 신상묵이 나팔수였다”고 적고 있다.

동기생 이정덕씨는 “신상묵씨는 처음엔 나팔수를 했지만 나중엔 대대장까지 됐다”고 회고했다. 신씨의 대구사범 1년 선배(4기)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대구사범 재학시절 나팔수였다.

신씨는 1938년 3월 20일 졸업 후 전남 화순군 청풍소학교 훈도(교사) 생활을 하다가 일본군의 ‘조선특별지원병’에 응모했다. 1940년 7월 25일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발표된 조선특별지원병 1차 합격자 1415명의 명단에서 신씨는 전북지역 합격자의 맨 앞에 나와 있다.

일제강점기 호적자료에 따르면 신씨는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로 창씨 개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시게미쓰 구니오는 10여명의 지원병 수료생들과 함께 1940년 11월 8일 오후 4시부터 서울 반도호텔에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인터뷰를 갖고 입대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무엇이고 하면 반다시 성공할 수 잇다는 자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불가능이라는 것은 업는 줄 압니다. 그리고 복종이 잇서야 세상사가 모도 잘된다는 것을 알게 되엇습니다. 아무리 괴롭고 대개는 다소 실허도 절대로 복종하야 되겟다는 정신수양을 하게 되었습니다.”(맞춤법은 당시 원문대로임)

좌담회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도 있다. “소학교 아동들은 선생을 무조건하고 숭배 복종합니다. 그런 마음을 잘 아는 관계로 선생인 내 자신이 먼저 지원병이 되어야겟다고 생각햇습니다.”

대구사범 5기 동기생 생존자 중 두 사람에 따르면 신씨는 주로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대에 배치 받아 근무했으며 일본군 헌병 오장(憲兵 伍長)이 됐다.

동기생 송재천씨의 증언. “1943년 6월 충북 옥천의 죽향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신상묵이 오장 계급이 달린 헌병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찾아와 ‘일본군 징병기피자들을 찾고 있다. 교사를 하고 있으니 징집을 피해 숨어다니는 졸업생들과 관련된 정보가 있지 않느냐. 알고 있는 게 있으면 가르쳐달라’고 말했다. 나는 ‘아는 것이 없다’고 답했다.”

동기생 송성욱씨는 “신상묵은 고등교육을 받은 데다 교사경력까지 있어 일본군에 들어간 뒤 헌병이라는 좋은 보직을 받았고 진급도 빨랐다고 동기들에게 들었다”고 증언했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