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981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이른바 ‘386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열심히 배워 유능한 사회과학자가 되겠다던 입학 때의 야무진 꿈은 전두환 정권의 군홧발 덕분(?)에 ‘혁명투사’로 바뀌었다. 자본주의를 혁파하고 모든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저곳 떠돌며 노동자 의식화, 조직화 사업에 진력했다. 물론 이러한 삶은 중간에 바뀌었다. 10여년 전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라는 글을 통해 사회주의 포기 선언을 했을 때 ‘변절자’ ‘배신자’라는 융단폭격을 받았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친북좌익 주사파전력 반성안해▼
별로 밝히고 싶지 않은 개인사를 들먹인 이유는 현정권 386과의 진솔한 대화를 위해서다. 누가 뭐래도 386은 이 정권의 중추세력이다. 지금 이 나라를 일대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전위부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대들은 과거청산의 주역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위수김동’.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준말이다. 80년대 중반 이래 운동권 주류 자리를 한번도 내주지 않던 주사파의 골수들은 김일성을 그렇게 불렀다. 전대협과 한총련의 지도부를 주사파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내부자에게는 특별한 기밀이 아니었다. 이들은 북한의 대남적화 기구인 한국민족민주전선의 방송을 운동지침으로 삼았다.
그 주사파 출신들이 와신상담 끝에 현실정치에 참여해 현 정권 내 386의 다수를 점하고 있다. 나는 그들 중 누군가가 과거의 행적을 반성하고 자유주의자로 변신하겠다는 커밍아웃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아직도 그들은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으며 ‘정의의 사도’를 자임하고 있다.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밝힐 것은 밝히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기왕지사 과거사 진상규명을 할 것이라면 우리 국민이 386의 과거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김일성 체제를 신봉했던 ‘친북’이 ‘친일’을 청산하고 ‘개발독재’를 단죄해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것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여권은 ‘신색깔론’이라며 반발할 것이다. 그러나 공안검사를 속일 수는 있어도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지들을 속일 수는 없다. 자유주의자를 빨갱이로 모는 것은 악질적 색깔론이겠으나 주사파를 친북좌익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진실 확인일 뿐이다.
386을 폄훼하자는 게 아니다. 굴절된 한국현대사를 생각할 때, 누가 누구에게 그렇게 쉽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를 묻기 위함이다. 나는 박정희가 일본군 중위였다는 것을 안다. 광복 직후 좌익 활동을 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박정희를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한강의 기적’을 이끈 지도자로 기억하고 싶다. 나는 386이 87년 민주화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음을 잘 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김일성 체제와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오류를 범했음도 안다. 그러나 나는 386이 과거의 미망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더욱 공고히 한 세력으로 역사에 기록되길 바란다.
▼나라위해 과거 묻어둔 덩샤오핑▼
22일은 중국의 거인 덩샤오핑이 태어난 지 100주년 되는 날이다. 덩은 마오쩌둥 치하에서 두 번이나 실각되는 수모를 겪었다. 문화혁명 때는 홍위병의 테러로 장남이 반신불수가 됐다. 그러나 1978년 권력을 잡아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하면서도 마오 격하운동을 벌이지 않았다. 오히려 공(功)은 7이고 과(過)는 3이라며 마오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왜 그랬던 것일까?
나는 그 답을 다음 질문 속에서 찾고 싶다. 만일 덩이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처럼 마오 격하운동을 벌여 국민통합과 정치안정에 금이 갔다면 오늘날과 같은 개혁개방의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 비록 국적을 달리하지만 덩의 ‘큰 가슴과 긴 눈’을 생각하며 현 시국이 주는 답답함을 달래 본다.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