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경찰은 정복을 입고 거리를 순찰할 때 아주 천천히 걷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빨리 걸으면 시민들에게 불필요하게 불안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디 이뿐인가. 행인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부드럽게 미소 짓고 길을 묻는 관광객에겐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이런 평상시의 모습만 보고 영국 경찰을 물렁하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시위대가 폴리스라인을 벗어날 땐 곤봉이 무지막지하게 춤을 추고, 심지어 기마경찰은 말발굽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영국에서의 이런 상반된 경찰의 모습은 선진국에서 법과 원칙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가늠하게 해 준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서울의 대표적 거리랄 수 있는 세종로사거리는 툭하면 시위대 등에 점거당하기 일쑤다. 세상이 달라졌는데도 이런 모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시위대가 도로까지 점거하겠다고 사전에 집회신고를 했을 리 없고, 경찰이 그것을 허용했을 리 또한 만무하다. 그런데도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고, 경찰은 그저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만을 막느라 안간힘을 쓴다.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 등이 거리응원을 위해 세종로사거리로 나서기 시작할 무렵 한 고위 경찰 간부는 이렇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좋은 일인데 무조건 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허용하자니 앞으로가 걱정이고….”
이런 걱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여중생들을 추모하는 대열이 세종로사거리를 휩쓸었고 노동운동과 이라크파병 반대, 통일대회 시위대가 또한 이곳을 차지하기도 했다.
물론 도로도 국가나 자치단체의 중요 행사 땐 얼마든지 시민들에게 개방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예측 가능해야 하고, 또한 철저히 법과 원칙에 따라야 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아무렇게나 점거되도록 방치한다면 시민이나 운전자들의 불편은 고사하고 원칙이 무너지고, 그로 인해 정부의 권위 또한 실추될 게 자명하다.
우리 사회에서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곳이 어디 세종로사거리뿐이겠는가. 일상생활에서도, 노동현장에서도, 기업에서도, 국가기관에서도, 정치권에서도 원칙이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쳐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진국은 잘사는 것을 의미하고 잘산다는 것은 국민소득, 즉 돈이 기준이 될 수가 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 전반에서 얼마나 법과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도 중요한 기준일 것이다.
우리가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뒤를 돌아보기보단 앞을 내다보며 경제력을 키우고, 또한 법과 원칙이 제대로 서도록 해야 할 것이다.
조무제 대법관이 17일 퇴임식에서 후배 판사들에게 들려 준 말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어떤 분야에서는 법질서 존중의 의식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것은 보편적 사고에 의한 판단과 실천이 이뤄지지 못해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결과일 것이다.”
이진녕 사회부장 jinny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