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신기남의장이 19일 오전 당사에서 사퇴 기자회견 도중 선친의 행적에 대해 사죄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있다. 왼쪽은 의장직을 승계한 이부영 상임중앙위원.[연합뉴스]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이 선친의 일본군 헌병복무 등 친일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고 19일 의장직을 공식 사퇴했다.
신 의장은 이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친일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운동의 대의를 조금이라도 훼손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의장직에서 물러난다”면서 “앞으로 저는 친일 반민족 행위의 진상과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신 의장은 이어 “그 동안 선친이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부담이었다”면서 “자유독립국가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신 독립투사들이 목숨 걸고 싸울 때 선친이 일본군이었다는 점을 깊이 사과드리고 투사와 유족들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선친 관련 행적이 보도된 지난 3일간은 제 평생 격어보지 못한 가장 무겁고 심각한 고뇌의 시간이었다"면서 "선친이 일제시대 교사와 군에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선친의 일이라 선뜻 밝히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선친이 일제시대 경찰이었다는 말이 나왔던 7월 당시 제가 아는 사실만이라도 솔직하게 밝히지 못했던 것은 저의 모자람 때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저의 아픈 가족사를 딛고 역사적 과업을 이룰 때"라며 "저도 앞으로 대한민국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잡는데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혔다.
신 의장은 전날 당내 중진 및 핵심 당직자들과 만나 자신의 거취를 논의하고 의장직 사퇴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열린우리당은 18일 밤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긴금 기획자문위원회의를 열고 승계서열 1위인 이부영 상임중앙위원이 당 의장직으로 맡는다는데 합의했다.
한때 이부영 상임중앙위원의 의장직 승계와 조기전당대회 개최를 놓고 논란이 있었으나, 당권을 둘러싼 갈등을 최소화하자는데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의장직 승계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열린우리당은 또 이날 '과거사진상규명 통합입법을 위한 태스크포스(단장 원혜영 의원)'팀의 첫 회의를 열고 현재 국회에 제출돼 있거나 제출 예정인 15개의 관련 법안을 통합하는 과거사기본법을 만들기로 했다.
여권은 신 의장의 사퇴를 계기로 친일진상규명법 개정, 국회내 과거사특위 설치 등 과거사 청산 작업에 한층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여 정기국회를 앞둔 정국의 긴장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조창현 동아닷컴기자 cch@donga.com
신기남 의장의 사퇴의 변 전문
제 가족사의 아픔을 딛고 미래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담담하면서도 홀가분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최근 제 선친과 관련된 보도를 처음 접한 후 지금까지의 3일은 제 평생 겪어보지 못한 가장 무겁고 심각한 고뇌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최근의 보도를 접하기까지는 20년 전에 돌아가신 선친의 일제시대 행적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가 말해준 적도 없었습니다. 선친이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로 있다가 일제 말기에 한 때 일본군에 있었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헌병인지 일반병인지, 지원병인지 징병인지, 오장인지 사병인지, 언제 어디서 근무했는지 등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최근의 선친관련 보도를 접한 직후에 저는 즉시 제가 알고있는 사실을 그대로 고백하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맹세하건대 제가 아는 그대로 말했습니다. 군 복무사실까지도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아는 대로 솔직히 말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제 선친이 일본군에 종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늘 마음의 부담으로 있었습니다. 제 몸에 붙은 흠결이라면야 공인으로서 그 무엇이라도 먼저 밝혔겠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아버지의 일이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못했습니다. 영원히 묻어 둘 생각은 결코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밝혀지겠지만, 미처 말 할 준비가 안된 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보도에 한발 앞서서 지난 7월에 있었던 친일의혹제기, 즉 선친이 일제경찰이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 당시 저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인자함과 덕망을 갖추고 항상 주변에 도움을 베푸시던 분, 그리고 6.25 전쟁에서 전투경찰사령관으로서 우리나라의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으신 분을, 하루아침에 일제의 앞잡이로 매도하는 데 대해서만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제 평생 저의 자랑과 존경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7월 당시에 제가 아는 사실만이라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던 점은 저의 모자람이었다고 인정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솔직히 최근의 선친관련 상세한 보도에 대해서도 저도 충격이고 아직 전부를 믿기 어려운 심정입니다. 앞으로 저 스스로 더 잘 알아볼 생각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와서 저는 제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 그리고 이번에 새로이 알려진 사실에 대해서, 겸허한 마음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려 합니다. 오늘 우리가 자유독립 국가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신 독립투사 여러분, 그리고 유가족 여러분, 독립투사 여러분께서 목숨바쳐 싸우셨을 때 일제의 군 생활을 하셨던 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잘못이 있었다면 그 점에 대해서도 아버지를 대신하여 깊이 사과를 드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앞으로 저는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과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받기 위해서라도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 맹렬한 기세로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역사의 진실 위에서 민족이 화해하는 위업에 제가 기여하고, 그 영광을 독립투사 여러분께 바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제 아버지께서도 진정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평생 가지셨을 부담을 떨치고 마음이 후련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역사의 진실을 밝힐 때입니다. 과거와 화해하고 진정한 국민통합을 이루어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이 비상(飛上)할 채비를 갖출 때입니다. 민주평화개혁세력이 국회의 다수가 된 지금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 당원동지 여러분, 저는 친일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운동의 대의를 조금이라도 훼손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여러분께서 맡겨주신 당 의장직에서 물러납니다. 그것이 저 때문에 당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덜어드리는 길이며, 또한 당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추진하고 있는 민족정기 회복운동이 제대로 수행되도록 도와주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의 아픈 가족사를 딛고 역사적 과업을 이루어 주십시오. 대한민국을 과거사의 질곡, 국민 분열의 굴레에서 구하여 국민통합의 미래로 이끌어 주십시오. 저 역시 백의종군하여 이 과업을 이루기 위해 제 모든 힘을 다 바치겠습니다.
사랑하는 당원동지 여러분!
저는 물러납니다만, 지금까지 우리당이 가꾸고 키워온 시스템을 통해 창당작업을 완료시켜 주십시오. 100년 정당의 기초를 닦을 역사적 전당대회를 당내 모든 의원들과 전 당원동지들이 일치단결하여 준비해 주십시오.
또한 이번 정기국회를 통해 진정한 개혁의 시대를 열어 주십시오.
이 막중한 과제를 원내대표와 상임중앙위원, 중앙위원들이 단결하여 이끌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4년 8월 19일
열린우리당 신기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