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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민기자의 酒변잡기]술 앞에서 애간장 타는 주당

입력 | 2004-08-19 20:18:00


주력(酒歷) 20년인 애주가 서모씨(39)는 보름째 술을 끊고 있다. “이 상태에서 술을 마시면 간이 회복불능”이라는 의사의 준엄한 경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분간 저녁 약속은 무조건 피한다는 전략을 짰지만 며칠 전 술자리는 어쩔 수 없었다. 고향인 경북 영천에서 친구들이 올라온 것이다. 다들 술은 남들만큼 한다는 경상도 사나이 5명이 모인 자리에서 술 한 방울 안 마시고 버틴 서씨의 경험담.

약속장소는 서울역 근처의 한 소줏집. 그는 ‘열심히 잔에 술이나 채워주고 맛있는 안주나 먹으면 되겠지’라고 쉽게 생각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러 저러해서 술을 못 마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엄살 피우지 마라” “왕년에 그런 소리 안 들어본 사람 있나” 하는 식의 거센 반발과 집중적인 술잔 공세가 시작됐다.

맘을 독하게 먹었다. “오늘 더 이상 권하면 의절”이라고 결연하게 선언했다. 의절? 술 때문에 친구를 잃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기들끼리 술잔을 돌린다.

맨 정신의 서씨는 다른 테이블까지 관찰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먹고 살기 힘들다, 이 당은 이래서 저 당은 저래서 안 된다, 한숨, 넋두리…. 대화는 비슷했다.

15평 남짓한 조그만 가게는 경상도 출신 5인의 목소리로 시끄럽다. 서씨는 ‘지들만 술 먹나’ 하는 눈총을 여러 번 느껴야했다. 술기운이 오른 친구들은 타인의 반응에는 전혀 무관심.

고비가 왔다. 혀가 꼬부라진 친구 하나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얀마, 니가 술을 다 마다하고 뭔 지랄이여. 고만 까불고 내 술 한 잔 받어라.(딸꾹)”

“됐다.”

“허, 그 시키. 얀마, 1년 만에 시골서 친구가 올라왔는데…. 내 술 안 받으면 너, △△자슥이여.”

“….”

“자꾸 이라믄 내 정말 화낸대이.”

주인이 문 닫아야 하니 이제 일어나 달란다. 다행이다. 얼큰하게 취한 친구들을 보내고 술집에서 나와 집으로 오는 길, 서씨의 마음엔 미안함과 아쉬움이 반씩 섞였다. 애주가들은 술자리에서 술 한 잔 못하는 고통을 모른다. 참으로 힘든 4시간이었다.

‘무정한 놈들. 내라고 안 묵고 싶어서 이러겠나. 느그들도 의사의 경고를 받기만 해라. 내 그냥 두나.’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