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정제된 화면 연출로 미국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사건을 그린 극영화 '엘리펀트'. -사진제공 동숭아트센터
먼저 독자들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할 것 같은 문제부터 풀어 보기로 하자.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왜 굳이 제목을 ‘엘리펀트’, 곧 ‘코끼리’라고 지은 걸까. 사전지식이 없는 관객들이라면 자칫 무슨 동물 다큐멘터리나 서커스 영화 아닐까하고 착각할 우려가 있다. 하지만 천만에. 영화 ‘엘리펀트’는 그런 한가한 내용의 영화가 아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볼링 포 콜럼바인’으로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바람에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얘기 곧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 바로 ‘엘리펀트’다. ‘볼링…’은 다큐멘터리였지만 산트는 이를 극(劇)영화로 만들었다.
어쨌든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 왜 ‘엘리펀트’인가. 그건 마치 사람들이 코끼리를 더듬으면서 서로 자기가 아는 것만큼만 코끼리를 상상하는 것처럼 작금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적인 폭력의 이유와 원인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작품의 내용을 구구절절 얘기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다시 1999년 콜럼바인 고교의 비극으로 돌아가는 것도 왠지 마땅찮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꼭 그때의 사건을 다큐 식으로 재연하는 데만 주력한 것이 아니다. ‘볼링…’과는 오히려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작품이다.
구스 반 산트 감독
영화는 엄청난 충격을 던졌던 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다루면서도 때로 극단적일만큼 차분하고 냉정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볼링…’의 그 떠들썩한 수다와 다소간의 과장, 소란스러움, 그리고 명쾌한 목적의식 등과는 180도 정반대에 서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오히려 이 점이 사건의 섬뜩하고 충격적인 느낌을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다큐보다 더 강한 느낌으로 진실을 전달하는 극영화인 셈이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도 매우 인상적이다. 푸르디푸른 하늘에 무심하게 구름 한점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 영화는 참사 현장을 뒤쫓던 카메라가 다시 방향을 바꿔 무심한 하늘을 비추는 장면으로 끝난다. 푸르고 무심한 하늘.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그 밑에서는 문명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산트는 역설하고 있다.
‘엘리펀트’는 산트에게 있어 일종의 재기작. 이 영화는 2003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탔다. 그는 91년 ‘아이다호’로 잠깐 반짝했을 뿐 하강곡선을 그렸다. ‘카우걸 블루스’ ‘투 다이 포’ ‘굿 윌 헌팅’ ‘사이코’ ‘파인딩 포레스터’에 이르기까지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할리우드 주류 영화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다.
산트 같은 작가가 왜 따뜻하고 포용력이 넓은 선생님이 천재 소년을 발굴해서 키워내는 과정의 얘기를 두 번 씩이나 영화(‘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터’)로 만들 생각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그는 뿌리 뽑히고 소외된 청년기의 절망과 소외감에 유난히 많은 관심을 나타내온 감독이다. 70년대를 배경으로 마약중독자들을 소재로 한 ‘드럭스토어 카우보이’가 대표적이고 ‘투 다이 포’와 ‘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터’에도 그의 이런 관심이 일관되게 반영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엘리펀트’는 이 시대 청년들에 대한 그의 염려와 애정을 집대성한 작품인 셈이다. 그래서 그가 이제야 예전의 궤도를 다시 찾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구스 반 산트고 뭐고, 콜럼바인 총기 난사사건 얘기는 이제 지겹다고? 그런 소리 하지 마시길.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가 개봉됐을 때 그 얘기를 귀담아 들은 사람은 국내에서는 2만 명도 되지 않았다. 지겹다는 얘기가 오히려 지겨울 뿐이다.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