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브랜드의 본산으로 꼽히는 프랑스나 그 최대 수입시장으로 불리는 일본에서도 이들 패션 브랜드에 ‘명품(名品)’이라는 거창한 호칭을 붙이는 법은 없습니다. 오직 한국만이 해외 고가 브랜드에 ‘정신적 KS마크’를 내 주고 있어요.”
‘파리 여자, 서울 여자’(시공사)의 저자 심우찬씨(40·사진)는 일본의 패션회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한 3년을 빼고는 패션 유학을 떠난 1987년 이후 14년째 프랑스 파리에서 살고 있다. 국내 패션 디자이너들의 해외 진출을 도우며 패션 칼럼니스트로도 활약 중인 그는 한국 패션사업이 국적불명 상황에 놓인 것을 안타까워했다.
“세계 패션계는 지금 국제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미 파리 유명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는 프랑스인이 아닌 영국과 미국 사람들이 장악했어요. 막대한 자본을 배경으로 뉴욕과 런던이 파리를 제치고 패션산업의 중심지가 됐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파리를 ‘패션의 수도’로 존중해 주던 분위기도 9·11테러 이후로는 노골적 국수주의 바람이 불면서 사라졌어요. 미국자본의 패션잡지 ‘보그’나 ‘바자’ 등은 프랑스 디자이너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세계 패션계가 창의력보다는 거대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국가차원의 산업 논리로 움직이고 있는데 한국은 무방비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한국은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의 고가 패션 브랜드 수입시장이면서도 대접을 못 받고 있어요. 일본은 세계적 패션 브랜드의 본부를 빠짐없이 유치하고 있어 세계적 패션디자이너가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시장규모가 훨씬 작은 홍콩의 지시를 받고 패션 디자이너들로부터도 속물 취급만 받고 있지요.”
그러나 그가 보기에 한국 여성들의 패션감각만큼은 아시아 최고다. 서울 여성의 패션감각은 도쿄나 홍콩을 능가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 다만 패션산업이 국가간 자존심의 대결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 탓에 제 대접을 못 받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파리를 ‘패션의 수도’로 만든 것은 디자이너들 때문이 아니라 ‘프렌치 시크’라는 독특한 파리 여성의 패션감각 때문입니다. 미국 여성들은 수학공식처럼 판에 박힌 패션밖에 모르지만 파리 여성들은 싸구려 티셔츠와 고급 핸드백을 조화시킬 수 있는 개성을 지니고 있죠.”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이 코즈모폴리턴의 꿈은 한류(韓流) 열풍의 기회를 타고 한국 여성의 패션을 만방에 과시할 수 있는 한국 국적의 세계 패션 브랜드의 등장을 보는 것이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