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린 러일 전쟁… 넘어간 조선 주권1905년 9월 5일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 해군기지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평화조약에 정식으로 서명함으로써 러일전쟁은 막을 내렸다.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선한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았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했는데도 연합국은 왜 식민지 코리아에 즉각 독립을 주지 않고 분할점령을 했는지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분분하다. 다만, 우리 민족의 미숙한 정치역량에 대한 일제의 집요한 왜곡공작이 국제사회에 부정적 이미지를 형성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일찍이 일제의 조선 병탄부터가 그러한 공작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합의한 4대국의 신탁통치 방안 또한 우리 민족의 자치능력에 대한 열강의 회의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같은 국제사회의 오해 때문에 신탁통치에 대한 우려는 모스크바 3상회의 이전부터 국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따라서 초기 반탁운동은 자연발생적이었고 거기에 좌우가 있을 수 없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최근 조직적으로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다시 섬뜩함을 느낀다. 강대국의 역사 왜곡엔 반드시 제국주의적 패권주의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공간에서 극렬한 좌우대립을 촉발한 신탁통치론의 길고 깊은 뿌리를 더듬어 보면 오늘날에도 생생한 역사의 준엄한 교훈과 맞닥뜨리게 된다.》
●99년 전 포츠머스에서 시작된 비극
日, 광개토대왕비문도 훼손
광개토대왕비엔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노래한 1802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일제는 삼국시대에도 한반도를 식민지배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비밀리에 비문 일부를 변조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99년 전인 1905년 9월 미국 뉴햄프셔주의 군항 포츠머스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러시아의 패전으로 끝난 러일전쟁을 마무리하는 이 조약에서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사실상 인정해줬다. 영국이 곧바로 미국의 선례를 따랐다. 여기에 힘입어 일본은 그해 11월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협박해 이른바 ‘보호’조약을 받아들이게 했다.
루스벨트는 왜 코리아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용인했을까? 그는 우월하고 문명한 국가가 열등하고 미개한 국가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제국주의 일본의 흥륭(興隆)은 경탄 속에 바라본 반면 코리아는 나약하고 자치능력이 없는 나라로 분류했다.
놀라운 것은 이 ‘대국 중심적인 제국주의자’에게 노벨평화상위원회가 노벨평화상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포츠머스조약으로 동양에 평화를 가져오게 했다는 이유였다. 그것은 포츠머스조약의 희생자인 코리아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내년은 루스벨트의 노벨평화상 수상 100주년이어서 노벨평화상위원회의 역사적 과오가 더욱 뼈아프게 상기된다.
●국제사회의 부당한 조선대접은 왜?
1913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회고록을 출판했다. 하지만 방대한 양의 회고록 어느 구석에도 코리아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그는 코리아라는 단어조차 쓰지 않았다. 철저한 백인우월의식에 젖은 오만한 인종주의자인 그에게 코리아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미개한 나라로 비쳤던 것이다.
당시의 국제사회는 왜 코리아를 이처럼 부당하게 대접했을까? 일제의 끈질긴 왜곡공작 때문이었다. ‘조선은 열등하고 자치능력이 없어 일본과 같은 선진문명국의 보호와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게 일제가 국제사회에 끊임없이 전파한 논리였다. 일본 육군장교가 만주로 건너가 광개토대왕비문의 일부를 고쳐 마치 삼국시대에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것처럼 역사조작을 시도한 것도 왜곡공작의 일환이었다.
마침 영국의 사회철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정립한 사회진화론이 세계적으로 풍미하고 있었다. 진화에 앞선 우월한 종이 진화에 뒤진 열등한 종을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처럼 국제사회에서도 진화에 앞선 우월한 민족이 진화에 뒤진 열등한 민족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루스벨트와 처칠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강대국 반열에 먼저 올라선 일제의 코리아 역사와 민족성에 대한 교묘한 악선전은 열강의 구미에 딱 맞아 자연스럽게 먹혀들었다. 여기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사람이 루스벨트의 사촌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을 이끈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코리아의 인민들은 자치능력이 없으므로 일제가 패망한 뒤 수십년에 걸쳐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받으면서 정부 운영능력을 수습(修習)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그의 제의가 소련 영국 중국(국민당 정부)에 받아들여져 뒷날 한민족의 장래를 꼬이게 만드는 화근이 됐음은 물론이다.
미국 대통령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우리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조선의 독립을 약속한 연합국 최초의 공식문서는 1943년 ‘카이로선언’인데, 거기에 나오는 ‘적당한 과정을 거쳐’라는 구절은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인 듀 코스(in due course)’라는 세 단어는 이후 코리아의 장래에 큰 장애물이 된다.
●조선은 中 식민지라고 한 마오쩌둥
‘코리안들은 자치능력이 없다. 항일독립운동을 이끄는 코리아의 지도자들 중에도 일제가 패망한 이후 자기 나라를 이끌어갈 인물이 없다. 일제가 패망한 뒤 코리아에 즉각적인 독립을 주는 것보다는 선진국의 고문들이 코리안들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면서 코리아를 통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국의 대석학인 아널드 토인비가 1944년 영국 외무부에 제출한 보고서도 그 기조는 같았다. 그는 코리아를 신탁통치할 나라들로 미국 영국 소련은 물론 네덜란드 호주 뉴질랜드 등도 꼽았으니, 자칫 잘못됐으면 한민족은 작은 나라들의 지배까지 받을 뻔했다.
중국은 한 술 더 떴다. 오늘날 중국과 대만 양쪽에서 존경받는 쑨원(孫文)이나 국민당 정부의 총통이던 장제스(蔣介石) 모두 코리아를 중국의 종주권(宗主權)을 되찾아야 할 나라로 인식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역시 1936년 미국의 신문기자 에드거 스노와 회견하면서 코리아를 중국이 잃어버린, 따라서 앞으로 되찾아야 할 식민지 명단에 포함시켰다. 중국은 그때도 코리아를 자기네 속방(屬邦) 정도로 여겼다.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를 자기네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다.
●조선 민족주의에 대해 경고한 레닌
소련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니콜라이 레닌은 모스크바를 찾아온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그들이 요구한 액수 이상의 큰 돈을 금괴로 주면서 격려하기도 했으나 그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파벌싸움을 문제 삼아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운동기구)의 ‘코리아국(局)’을 없앴다. 그뿐만 아니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이끄는 국제반제(反帝)운동에 봉사해야지 자국의 민족주의적 목적에 봉사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열강의 그릇된 인식에 맞서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한민족이 결코 열등하거나 미개하지 않음을 누누이 강조했다. 코리아는 일제의 농간과 힘에 밀려 나라를 빼앗겼을 뿐이지 얼마든지 독립해서 정부를 운영할 자치능력이 있음을 수없이 역설했다.
그런데도 일제가 만들어 퍼뜨리고 열강이 받아들인 잘못된 논리에 묶여 한민족은 국권을 잃었고 광복 이후에도 신탁통치 문제로 심한 홍역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결국은 분단의 멍에를 쓰게 됐다. 신탁통치 문제는 본 시리즈윙명한 국가가 열등하고 미개한 국가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제국주의 일본의 흥륭(興隆)은 경탄 속에 바라본 반면 코리아는 나약하고 자치능력이 없는 나라로 분류했다.
놀라운 것은 이 ‘대국 중심적인 제국주의자’에게 노벨평화상위원회가 노벨평화상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포츠머스조약으로 동양에 평화를 가져오게 했다는 이유였다. 그것은 포츠머스조약의 희생자인 코리아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내년은 루스벨트의 노벨평화상 수상 100주년이어서 노벨평화상위원회의 역사적 과오가 더욱 뼈아프게 상기된다.
●국제사회의 부당한 조선대접은 왜?
1913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회고록을 출판했다. 하지만 방대한 양의 회고록 어느 구석에도 코리아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그는 코리아라는 단어조차 쓰지 않았다. 철저한 백인우월의식에 젖은 오만한 인종주의자인 그에게 코리아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미개한 나라로 비쳤던 것이다.
당시의 국제사회는 왜 코리아를 이처럼 부당하게 대접했을까? 일제의 끈질긴 왜곡공작 때문이었다. ‘조선은 열등하고 자치능력이 없어 일본과 같은 선진문명국의 보호와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게 일제가 국제사회에 끊임없이 전파한 논리였다. 일본 육군장교가 만주로 건너가 광개토대왕비문의 일부를 고쳐 마치 삼국시대에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것처럼 역사조작을 시도한 것도 왜곡공작의 일환이었다.
마침 영국의 사회철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정립한 사회진화론이 세계적으로 풍미하고 있었다. 진화에 앞선 우월한 종이 진화에 뒤진 열등한 종을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처럼 국제사회에서도 진화에 앞선 우월한 민족이 진화에 뒤진 열등한 민족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루스벨트와 처칠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강대국 반열에 먼저 올라선 일제의 코리아 역사와 민족성에 대한 교묘한 악선전은 열강의 구미에 딱 맞아 자연스럽게 먹혀들었다. 여기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사람이 루스벨트의 사촌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을 이끈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코리아의 인민들은 자치능력이 없으므로 일제가 패망한 뒤 수십년에 걸쳐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받으면서 정부 운영능력을 수습(修習)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그의 제의가 소련 영국 중국(국민당 정부)에 받아들여져 뒷날 한민족의 장래를 꼬이게 만드는 화근이 됐음은 물론이다.
미국 대통령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우리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조선의 독립을 약속한 연합국 최초의 공식문서는 1943년 ‘카이로선언’인데, 거기에 나오는 ‘적당한 과정을 거쳐’라는 구절은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인 듀 코스(in due course)’라는 세 단어는 이후 코리아의 장래에 큰 장애물이 된다.
●조선은 中 식민지라고 한 마오쩌둥
‘코리안들은 자치능력이 없다. 항일독립운동을 이끄는 코리아의 지도자들 중에도 일제가 패망한 이후 자기 나라를 이끌어갈 인물이 없다. 일제가 패망한 뒤 코리아에 즉각적인 독립을 주는 것보다는 선진국의 고문들이 코리안들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면서 코리아를 통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국의 대석학인 아널드 토인비가 1944년 영국 외무부에 제출한 보고서도 그 기조는 같았다. 그는 코리아를 신탁통치할 나라들로 미국 영국 소련은 물론 네덜란드 호주 뉴질랜드 등도?제1부 후반부에서 보다 상세하게 조명해볼 예정이다.
▼열강 지도자들의 조선에 대한 잘못된 인식▼
임채청부국장 cclim@donga.com
특별취재팀 전화 : 02-2020-0235, e메일 : 815@donga.com
▼16일자 시리즈 첫 회에 나오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각도(各道) 보안부장 회의록’에 관해 독자 여러분의 문의가 많았습니다. 당시 김일성 집단은 소련군 지시로 주요 회의 내용을 꼼꼼히 기록해 두었는데 6·25 전쟁 때 미군이 등사판으로 인쇄된 원본 상당량을 입수해 현재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보관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를 ‘노획된 북한문서’라고도 합니다.
聆洋求?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다.
●조선 민족주의에 대해 경고한 레닌
소련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니콜라이 레닌은 모스크바를 찾아온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그들이 요구한 액수 이상의 큰 돈을 금괴로 주면서 격려하기도 했으나 그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파벌싸움을 문제 삼아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운동기구)의 ‘코리아국(局)’을 없앴다. 그뿐만 아니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이끄는 국제반제(反帝)운동에 봉사해야지 자국의 민족주의적 목적에 봉사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열강의 그릇된 인식에 맞서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한민족이 결코 열등하거나 미개하지 않음을 누누이 강조했다. 코리아는 일제의 농간과 힘에 밀려 나라를 빼앗겼을 뿐이지 얼마든지 독립해서 정부를 운영할 자치능력이 있음을 수없이 역설했다.
그런데도 일제가 만들어 퍼뜨리고 열강이 받아들인 잘못된 논리에 묶여 한민족은 국권을 잃었고 광복 이후에도 신탁통치 문제로 심한 홍역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결국은 분단의 멍에를 쓰게 됐다. 신탁통치 문제는 본 시리즈윙명한 국가가 열등하고 미개한 국가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제국주의 일본의 흥륭(興隆)은 경탄 속에 바라본 반면 코리아는 나약하고 자치능력이 없는 나라로 분류했다.
놀라운 것은 이 ‘대국 중심적인 제국주의자’에게 노벨평화상위원회가 노벨평화상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포츠머스조약으로 동양에 평화를 가져오게 했다는 이유였다. 그것은 포츠머스조약의 희생자인 코리아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내년은 루스벨트의 노벨평화상 수상 100주년이어서 노벨평화상위원회의 역사적 과오가 더욱 뼈아프게 상기된다.
●국제사회의 부당한 조선대접은 왜?
1913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회고록을 출판했다. 하지만 방대한 양의 회고록 어느 구석에도 코리아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그는 코리아라는 단어조차 쓰지 않았다. 철저한 백인우월의식에 젖은 오만한 인종주의자인 그에게 코리아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미개한 나라로 비쳤던 것이다.
당시의 국제사회는 왜 코리아를 이처럼 부당하게 대접했을까? 일제의 끈질긴 왜곡공작 때문이었다. ‘조선은 열등하고 자치능력이 없어 일본과 같은 선진문명국의 보호와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게 일제가 국제사회에 끊임없이 전파한 논리였다. 일본 육군장교가 만주로 건너가 광개토대왕비문의 일부를 고쳐 마치 삼국시대에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것처럼 역사조작을 시도한 것도 왜곡공작의 일환이었다.
마침 영국의 사회철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정립한 사회진화론이 세계적으로 풍미하고 있었다. 진화에 앞선 우월한 종이 진화에 뒤진 열등한 종을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처럼 국제사회에서도 진화에 앞선 우월한 민족이 진화에 뒤진 열등한 민족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루스벨트와 처칠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강대국 반열에 먼저 올라선 일제의 코리아 역사와 민족성에 대한 교묘한 악선전은 열강의 구미에 딱 맞아 자연스럽게 먹혀들었다. 여기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사람이 루스벨트의 사촌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을 이끈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코리아의 인민들은 자치능력이 없으므로 일제가 패망한 뒤 수십년에 걸쳐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받으면서 정부 운영능력을 수습(修習)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그의 제의가 소련 영국 중국(국민당 정부)에 받아들여져 뒷날 한민족의 장래를 꼬이게 만드는 화근이 됐음은 물론이다.
미국 대통령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우리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조선의 독립을 약속한 연합국 최초의 공식문서는 1943년 ‘카이로선언’인데, 거기에 나오는 ‘적당한 과정을 거쳐’라는 구절은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인 듀 코스(in due course)’라는 세 단어는 이후 코리아의 장래에 큰 장애물이 된다.
●조선은 中 식민지라고 한 마오쩌둥
‘코리안들은 자치능력이 없다. 항일독립운동을 이끄는 코리아의 지도자들 중에도 일제가 패망한 이후 자기 나라를 이끌어갈 인물이 없다. 일제가 패망한 뒤 코리아에 즉각적인 독립을 주는 것보다는 선진국의 고문들이 코리안들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면서 코리아를 통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국의 대석학인 아널드 토인비가 1944년 영국 외무부에 제출한 보고서도 그 기조는 같았다. 그는 코리아를 신탁통치할 나라들로 미국 영국 소련은 물론 네덜란드 호주 뉴질랜드 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