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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도 사건 진실은]‘권력 횡포’에 짓밟힌 소록도의 꿈

입력 | 2004-08-23 19:10:00

한센병 환자들이 맨손으로 둑을 쌓아 조성한 오마리 농지. 가운데 둑을 경계로 왼쪽이 간척농지, 오른쪽은 바다.- 고흥=조수진기자


《‘실미도 사건’과 함께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대표적 인권유린 사건인 ‘오마도 사건’의 진상 규명 작업이 시작된다. 대한변호사협회는 ‘한센병 인권 소위원회’를 구성해 이 사건의 진상 규명과 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 중이라고 23일 밝혔다. 오마도 사건이란 40여년 전 전남 소록도에 수용돼 있던 한센병(나병) 환자들을 동원해 고흥군 도덕면 오마도 북쪽 바다를 메워 330만평의 농지를 조성한 대규모 간척사업의 완공을 앞두고 당국이 한센병 환자들을 배제한 뒤 지역 주민들에게 간척지를 나눠준 사건. 대한변협은 이를 ‘권력이 사회적 약자였던 나환자들을 착취 유린한 대표적 사건’이라고 보고 국회에 관련법 제정을 요청키로 했다.》

전남 고흥군 도덕면 오마리.

반듯반듯 바둑판 모양으로 정리된 330만평의 넓은 평야에서 바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긴 둑을 경계로 오른쪽에 바다가 누워 있을 뿐 ‘말 모양의 섬 다섯 개’란 뜻의 오마도(五馬島)는 잊혀진 이름이었다. 마을 어귀 기념비에서 간신히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었다.

‘오마도는 본래 무인도였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1962년 간척공사를 하여 동편으로는 풍양면, 서편으로는 도양읍으로 육지로 연결됐다.’

오마도 간척사업은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손에 의해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이뤄졌다. 음성 나환자들이 그들의 정착촌을 짓겠다는 집념 하나로 소록도 북쪽 풍양반도에서 오동도까지의 385m, 오동도에서 오마도 남단 기슭까지 338m, 그리고 그 오마도에서 도양읍 봉암반도까지 1560m의 바다를 메웠다.

간척사업에 참여했던 소록도 주민 김기현(金基顯·88) 할아버지는 당시 작업상황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소록도 병원장이던 조창원 원장이 어느 날 ‘바다를 메워 음성환자 정착촌을 짓자’는 거야. 아무도 반대를 안 했어. 소록도를 나가고 싶었고, 우리들만의 땅도 갖고 싶었기 때문이지.”

바다를 메워 이루려고 한 땅은 소록도의 2배, 서울 여의도의 3배 규모.

음성 환자 2000명이 2개 작업대를 만들어 1개 작업대가 한 달씩 교대로 일했다. 소록도 주민 5000명 중 음성 환자는 3300명이었고, 작업이 가능한 인원이 2000명이었으니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가 참여한 셈이다.

“오마도 바다는 유난히 펄이 깊었어. 만조 때는 수심이 8m나 됐지. 30m짜리 철근이 다 들어갈 정도였어. 소록도에서 대나무를 잎째 베어 줄을 맞춰 펄에 박았는데, 다음날 눈을 떠보면 이파리만 남아 있었어. 대나무와 소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수십번씩 박아 넣고, 그 다음엔 섬에서 캐낸 흙과 돌을 쏟아 부었어. 맨손으로 흙과 돌을 캐서 손수레에 싣고 1000m가량 가서 부어 넣었는데….”

작업도구란 환자들의 손과 손수레가 전부였다. 산을 허물며 내려오는 작업이어서 산사태가 잦았고 사고도 많았다. 2명이 죽고 수십명이 허리와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흙과 돌을 퍼다 붓고 하룻밤 자고 나면 밀물이 그 흙을 육지 쪽으로 몰아붙이면서 해안선 앞쪽에 작은 산이 생겨. 그러면 허물어서 바다에 퍼붓고, 또 허물어 바다에 퍼붓고…. 겨울이 가장 힘들었어. 손이 다 터져서 손가락을 구부릴 수도 없었거든.”

그러나 땀의 결실은 환자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투석작업 80% 이상, 갑문공사가 90% 정도 완성될 무렵 6대 총선이 치러졌다. 당시 육지 주민들은 나환자들이 소록도를 나오는 것을 결사반대했고 공화당 정권은 선거를 의식해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나환자들이 작업장에서 쫓겨난 것이다.

소록도 환자들은 1957년 8월에도 재활촌 건설을 시도했다. 삼천포 앞바다 빅토리섬을 개간하려 한 것. 하지만 이들의 정착을 반대하는 주민 500여명의 습격으로 23명이 죽고, 70여명이 중상을 당하면서 이마저 좌절됐다. 그러나 환자들은 항의나 법적 대응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나환자들을 사람 취급 하지 않는 사회분위기 때문이었다.

지금 소록도에는 간척사업에 참여했던 환자들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상당수가 이미 사망했고 나머지도 나환자 격리 규정이 폐지됨에 따라 섬을 떠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 할아버지는 “죽어라고 개척한 땅을 고스란히 뺏겼다”며 “그때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하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고흥=조수진기자 jin0619@donga.com

▼오마도 간척사업은▼

오마도 사건은 1962년 전남 고흥군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이 소록도 근처 오마도 앞 바다를 메워 자신들의 생활터전(농토)을 마련하려 했으나 완공 직전 군사정부의 개입으로 간척지에서 쫓겨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소설가 이청준(李淸俊)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오마도 간척사업은 1962년 군의관 출신인 조창원 소록도병원장의 주도로 시작됐다. 음성 나환자들의 생활터전을 마련해 농사를 짓게 하자는 취지. 간척사업은 소록도 북쪽 봉암반도와 풍양반도의 한가운데 떠 있는 무인도 오마도를 육지와 연결하고 안쪽 바다를 메워 330만평의 농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환자들은 맨주먹으로 돌멩이를 날라 바다를 메우는 작업을 했다. 2년여에 걸친 투석작업으로 물막이 공정의 80∼90%가 끝났을 무렵 정부는 간척사업에서 나환자들을 쫓아냈다. 당시 총선거를 의식해 “나환자들과 함께 육지에서 살 수 없다”며 간척사업을 반대하던 주민들의 민원에 굴복한 것. 새 터전에서 새 삶을 살아보려던 나환자들의 꿈은 허무하게 좌초됐고 오마도 간척지는 1989년 완성돼 일반 주민들에게 분양됐다.

오마도 사건을 그린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1975년 ‘신동아’에 연재되기 시작했으며 문학과지성사가 1976년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이 작품은 2003년 100쇄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국내 순수문학 작품 가운데 100쇄 돌파는 최인훈의 ‘광장’과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후 세 번째.

김윤식(金允植) 명지대 석좌교수는 이 소설에 대해 “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제에 도전한 최초의 한국작가”라고 평했다.

대한변호사협회 ‘한센병 인권소위원회’ 박찬운(朴燦運) 위원장은 “9월 정기국회에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를 통해 오마도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특별법을 제정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변협은 23일 열린 15회 변호사대회에서도 나환자 문제를 대표적인 인권사각지대로 지목했다.

조수진기자 jin0619@donga.com

▼조창원 “오마도 진실 바로잡는게 내 마지막 소원”▼

자신이 그린 유화 오마도 간척사업을 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조창원 전 소록도 자혜병원장.- 이종승기자

조창원(趙昌源·79·현 경남 밀양시 영남의료재단 명예원장) 전 소록도 자혜병원장은 오마도 간척사업의 주역이자 오마도 사건의 산증인이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으로 소설에서 섬의 환자들과 완전한 교감을 위해 고뇌하는 ‘조백헌 대령’은 그를 모델로 했다.

23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 자택에서 만난 조 전 원장은 “오마도 사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자립해 보려던 나환자들에게 정부와 성한 사람들이 도와주기는커녕 그들의 마지막 삶의 희망을 빼앗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강원 홍천군의 육군 제2야전병원장(중령)으로 있다가 5·16 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9월 소록도 병원장(대령)으로 부임했다.

조 전 원장은 “당시 군부 정권으로부터 정치에 참여하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면서 조용하게 살고 싶어 자원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소록도 병원장에 부임할 무렵 수용된 한센병 환자는 5300여명. 그중 절반 이상은 이미 완치돼 전염성이 없는 음성 환자였다. 그러나 사회는 이들을 전혀 받아주지 않았다. 호적이 없는 경우도 있어 ‘소록도 ○씨’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또 300여명에게 처음으로 귀향토록 했으나 가족들도 안 받아줘 돌아왔다고 한다.그래서 결심한 것이 오마도 간척사업. 스스로 살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조 전 원장은 소설에서처럼 환자들과 일체가 돼 공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상황에 의해 그는 1964년 3월 서울국립의료원 부원장으로 ‘원치 않는 영전’을 했고 사업은 중단됐다.

그는 “오마도의 진실이 밝혀져 바로 잡히는 것이 생애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조 전 원장은 요즘 오마도 간척사업 모습을 화폭에 담으며 지낸다.

이수형기자 so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