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환 화백의 신작 ‘변화’(2004년). 현실 밖의 세계를 이미지화하는 추상작업을 해 온 그가 이번 전시에선 지난 10여년 동안의 주제 ‘적막’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교감을 표현한 ‘변화’ 시리즈를 선보인다. 날아 오르는 새의 모습같기도 하고 기운찬 인간의 율동같기도 한 선들은 모든 것을 벗어던진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한다.-사진제공 가나아트센터
때로 예술가의 길이 초월이나 절대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길과 통한다면, 오수환 화백(58·서울여대 서양화과 교수)은 이에 걸맞은 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한지가 아니라 캔버스 위에, 먹이 아니라 유화로 그려진 서양화다. 하지만 화면 위에 남겨진 검은 선들은 마치 서예의 필획처럼 보여 사뭇 동양화 분위기를 자아낸다.
캔버스 위에 휙휙 붓질만 오간 그의 작품들은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오수환 그림읽기의 키워드는 작가가 그림에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나는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걸,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이미지’로 표현하려 한다.”
그의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이게 그림이야?’라는 당혹스러움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이 점차 ‘오수환 마니아’로 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초월의 기운이 화폭에서 전달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눈을 감고 좌선을 하듯, 그의 그림은 ‘쳐다보는 명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화실을 찾았을 때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수없이 선 드로잉을 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연습하지 않으면 손맛을 잃는다는 작가에게서, 종이 위에 그려지고 뭉개지고 휘갈겨진 선들에서, 수행과 각고의 흔적이 배어 나왔다.
오수환 화백
그는 40여년간 추상 외길을 걸어온 듯 보이지만 잠깐 구상을 그린 외도도 했다. 피가 뜨거웠던 20대, 반정부 시위를 하던 친구들이 경찰에 잡혀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그림은 포스터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그러다 대학 4학년 때 군에 입대해 베트남 파병을 자원한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경험은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허구’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는 젊은 시절의 허무를 절대나 초월을 통해 극복했다. 현실 밖의 세계, 지금 이곳과는 다른 세계, 이념이나 인간을 넘은 세계에 천착했다. 결국 다시 추상으로 돌아왔다.
2년 만에 여는 이번 신작 개인전의 주제는 ‘변화’. 10여년 동안 일관한 주제였던 ‘적막’과는 사뭇 다르다.
“적막이 움직이지 않는 세계, 영혼과 고요의 세계, 마치 홀로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앉아있는 세계였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적막 속에서 찾는 생기, 에너지를 표현했다.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과 사물, 자연과 인간, 교감 속에서 만들어진 우주의 에너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친구인 소설가 한수산씨는 그의 신작들을 보고 “오수환이 이제, 선을 ‘놓아 버렸다’”고 표현했다. 과거 선에 대한 일종의 강박 기운이 있었다면 이제는 모든 것을 벗어던진 자연스러움이 배어 나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술에서 기대하는 것은 영혼의 위안”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화가들이 과연 무엇을 해야 할지 묻자 이렇게 말했다.
“화가는 세상을 화해시키는 중재자다. 치열하고 순수해야 한다. 화가는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오랜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치는 의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사막에서의 중얼거림이요, 수신자 없는 편지를 쓰는 지독하게 고독한 일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근작 100여점이 선보이는 대규모 개인전은 9월3∼30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02-720-1020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