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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 ‘고구려사 왜곡’ 해결 5개항 구두합의

입력 | 2004-08-24 18:55:00

22일 방한한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24일 오전 9시30분발 중국민항기를 이용해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출국 전 인천국제공항에서 우 부부장은 한중간의 고구려사 협상 내용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겠다는 듯 손을 내젓고 있다.- 인천=연합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 해결을 위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최영진(崔英鎭) 외교통상부 차관과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아시아담당 부부장(차관)이 24일 이 문제 해결을 위한 ‘5대 양해 사항’에 합의하자 정부 고위당국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양해’로 중국은 사실상 역사교과서 개정 같은 정부 차원의 왜곡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셈이다. 이에 따라 양국간 갈등을 고조시켜 온 이 문제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드는 양상이다. 하지만 중국의 이런 변화가 고구려사 편입 시도의 완전한 포기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의 변화, 전략인가 전술인가=중국 정부가 우 부부장을 비밀리에 한국으로 보내며 고구려사 문제 해결에 적극적 자세를 보인 것은 이 문제가 한중 관계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

중국은 특히 한국 여론과 정치권의 대(對)중국 분노에 대해 적지 않은 당혹감을 보여 왔다. 중국 고위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비공식 외교채널을 통해 “한국 내 지나친 반중(反中) 정서는 양국 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으니 한국 정부가 나서서 좀 자제시켜 달라”고 한국측에 요청해 왔을 정도.

이처럼 한중 관계에 균열이 생기면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고구려사 문제는 긁어 부스럼’이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한 것도 중국 정부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줬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변화는 큰 그림을 바꾸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전략적’이라기보다 ‘전술적’ 측면이 여전히 강하다.

중국측은 우 부부장의 이번 방한 자체를 일절 비공개할 것을 강하게 요청했고 ‘정부 차원의 고구려사 왜곡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구속력이 약한 ‘구두 양해 사항’에 담았다. 한국 정부는 합의서 형식을 원했으나 중국이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구려사 왜곡 파문의 발단인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의 고구려사 삭제 문제에 대해선 원상회복은 어렵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이번엔 약속 꼭 지켜라”=정부 당국자들은 “이번에 중국이 문제 해결에 성의를 보인 것을 평가한다”면서도 “경각심을 늦추지 않겠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외교부 홈페이지의 고구려사 삭제를 통해 ‘이 문제를 정치쟁점화하지 않겠다’는 양국간 2월 합의만 믿고 있던 한국 정부의 뒤통수를 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이번에 중앙과 지방정부 차원의 고구려사 왜곡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천 여부를 검증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도 정부의 고민이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적반하장’ 중국 “고구려문제는 한국탓 촉발” 주장

최영진 외교통상부 차관과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아시아담당 부부장은 23일 오전 1시간 반, 오후 4시간 등 총 5시간반 동안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대한 해법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우 부부장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시도는) 한국측이 동북지방의 영토와 국경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촉발된 것”이라는 식의 논리를 펴 최 차관이 강하게 반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측은 “한국의 학계와 정계에서 ‘중국의 동북지방 회복’을 주장해 왔고 일부 정부 관련기관 발행 자료엔 ‘만주(滿洲) 진입’ ‘만주 진주’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도 역사 문제의 정치화를 방지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는 것.

이에 한국측은 “고구려사 파문이 확산된 것은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의 ‘고구려사’ 삭제 같은 정부 차원의 왜곡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한국 내 학계 주장과 중국 정부 차원의 왜곡 시도를 동일시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중국은 심지어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 역사교과서나 참고서에서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려 했다’고 기술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으나 한국측은 “있지도 않은 일에 대해 뭘 약속하라는 것이냐”고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치열한 공방 속에서 양국 대표단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고 한 관계자가 전했다.

한편 중국측은 우 부부장의 극비 방한이 한국 언론에 보도된 데 대해 “그렇게 비공개를 강력히 요청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한때 방문 자체를 백지화하는 방안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학계 부정적 평가 "추상적 합의…미봉책에 불과"

한국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 구두합의 내용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인 최광식(崔光植)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중국 외교부의 홈페이지를 바로잡거나 동북공정에서 고구려사 왜곡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어야 한다”며 “구두합의인데다 내용도 추상적이어서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서길수(徐吉洙) 고구려연구회장은 “중국 지안(集安)과 환런(桓仁)의 고구려 유적 현장에는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명시하는 등 이미 고구려사 왜곡이 완료된 상태인데 이를 바로잡겠다는 합의가 없다”며 “중국이 역사적 침략을 해오다 저항이 거세지자 잠시 중단한 것뿐이므로 계속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