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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방형남 칼럼]불감증의 시대

입력 | 2004-08-25 18:55:00


미국의 석학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는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화두로 지구촌이 짊어진 고민을 분석했다. 자본가는 자본주의의 번영에, 제국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그들 체제의 성공에 확신을 갖고 있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현재의 인류는 온갖 분야에서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있다는 발상이 분석의 토대였다. 전 세계의 수많은 독자들은 뛰어난 학자 덕분에 불확실성이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됐다.

개별 국가에도 전국을 아우르는 중심 기류가 있게 마련이다. 특히 잘나가는 국가에는 국민이 공유하는 분명한 화두가 있다. 그 정도는 갈브레이스의 우주적 시각을 갖추지 못한 일반인도 쉽게 안다.

▼국론 모을 화두가 없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약진하는 중국이 좋은 사례다. ‘잘살아 보자’, ‘지금보다 더 강력한 국가를 만들자’는 13억 인구의 의지가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다. 사망한 지 7년이 지난 지도자 덩샤오핑의 출생 100주년을 맞아 중국 전국을 뒤덮고 있는 추모 열기도 중국인들을 하나로 묶는 끈이다. 올림픽에서 맹위를 떨치는 선수들의 힘과 엉뚱한 데로 흘렀지만 고구려사 왜곡도 대다수 중국인이 공유하는 팽창정신에서 나온다.

시선을 안으로 돌려 보자. 현재 우리 국민에게 공통의 화두가 있는가. 많은 국민이 TV 앞에 앉아 한마음으로 선수들을 응원하지만 그건 올림픽 기간의 ‘반짝 단결’에 불과하다. 날이 갈수록 편 가르기가 심해지는 형편이니 전국을 관통하는 긍정적 기류를 찾기는 틀렸다. 그보다는 갈브레이스가 제기한 불확실성류(類)의 부정적 흐름이 쉽게 눈에 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집권세력의 불감증이다.

얼마 전 북한이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우리민족끼리’라는 북한 인터넷 매체는 ‘정동영은 심사숙고하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정 장관의 광복절 기자회견을 파렴치한 망발이라고 매도한 뒤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의 노인 폄훼 발언까지 거론하며 ‘저질 인간’으로 몰아붙였다.

문제의 발단은 정 장관의 대북 관련 발언이다. 정 장관은 “(남북간) 소강상황의 기저에 (김일성 북한주석) 조문 문제와 탈북자 국내 이송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서 북한의 오해가 유발된 데 대해 안타까움을 갖고 있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북대화를 재개하기 위해 국내 비판을 무릅쓰고 북한에 고개를 숙인 것이다.

제3국에 체류하던 탈북자 468명을 입국시킨 인도적 조치를 유인납치테러라고 왜곡하며 ‘응당한 계산’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북한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고 뒷걸음질친 결과가 이 모양이다. 고개를 숙이니 북한은 무릎까지 꿇으라고 한다.

청와대는 또 어떤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성적으로 비하한 패러디를 게재한 책임을 물어 직위해제했던 직원을 불과 한 달 만에 복귀시켰다. 국민의 분노를 무시하는 행동이다. 그러니 북한이 협박을 하건 욕을 하건 꼼짝 않는 통일부를 탓할 형편이 아니다. 여론의 질책과 국가적 수모를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이 한스러울 뿐이다.

▼세금으로 사는 사람의 의무▼

다시 갈브레이스로 돌아가자. 그는 “모든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들에게는 국민의 주된 불안과 정면으로 대결하려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런 자세야말로 지도력의 본질이다”고 갈파했다. 일그러진 대북정책, 정부의 도덕 불감증은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경제위기도 국론분열도 이 시대의 불안이다. 그런 불안과 대결하려면 먼저 심각성을 느껴야 한다.

통쾌한 한판으로 금메달을 따 내 국민을 기쁘게 한 이원희 선수는 경기 전 “세금으로 사는데 금으로 보답해야죠”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세금으로 사는 높으신 분들은 무엇으로 국민에게 보답할 것인가. 당장 보답할 형편이 아니라면 국가적 불안을 느끼는 감수성이라도 회복하기 바란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