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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인]‘작은 숲 큰 세상’ 명동 유네스코빌딩 옥상공원

입력 | 2004-08-26 16:37:00


“…예전에는 그냥 풀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던 식물들이 모두 알고 지내는 친구처럼 보인다.”(박주형)

“비가 왔다. 식물들이 몇 배 커졌을지 모른다. 지렁이는 물 밖으로 나와 꼼지락꼼지락 아침체조도 하겠지. 갯버들의 뿌리도 땅을 꽉! 잡고 있을 텐데. 갯버들 파이팅!!! 저번 주에 발견했던 의문의 곤충은 아직도 잘 살까….”(홍주연)

서울 남산초등학교 6학년생들로 구성된 ‘한해살이반 모니터링단’의 생태계 관찰소감이다. 아이들이 관찰한 생태계는 교외의 녹지가 아니라 서울 한복판 11층짜리 건물 꼭대기에 있다. 명동 유네스코 회관 옥상에 만들어진 공원 ‘작은누리’가 그 곳.

○작지만 알찬 생태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교실 9개 넓이인 190평의 옥상을 방수처리하고 30∼50cm 두께의 흙을 깔아 야생덤불숲과 풀꽃동산, 연못, 텃밭을 만든 뒤 지난해 4월 ‘작은누리’의 문을 열었다.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곳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덤불과 풀꽃들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구획을 지어 반듯하게 녹지를 다듬은 여느 옥상 공원들과 달리 흡사 작은 숲의 모양새다.

가을에 가장 먼저 피는 두메부추는 벌써 꽃을 피웠고 버들과 돌콩이 무성하게 자랐다. 개암나무 석류나무에도 열매가 열렸고 안쪽 습지 연못가의 억새에는 꽃이 움트기 시작했다. 어디서 씨앗이 날아왔는지 코스모스도 한 줄기 피어있다. 오동나무 이파리에는 섬서구메뚜기가 앉아있고, 습지 연못의 애기버들 사이에는 황금거미가 거미줄로 집을 지었다.

‘작은누리’를 처음 만들 때 사람이 심은 식물은 130여종. 지금은 200종이 넘는다. 바람에 날려 오거나 새가 물어온 씨앗들이 이곳에 제 몸을 심은 탓이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김승윤 팀장(청소년교류팀)은 솎아내야 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란 가죽나무들을 가리키며 “저 아래 중국대사관에서 날아왔다”고 한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중국대사관 마당에 가죽나무들이 무성하다. 그곳의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11층 위까지 비행한 것이다.

○메마른 도시의 오아시스

5월에는 지빠귀 한 마리가 날아와 괴불나무 열매를 쪼아 먹고 간 일이 있었다. 남산초등학교 모니터링단을 지도하는 숲연구소 이미옥씨(숲생태전문강사)는 “남산에 서식하는 지빠귀는 시내에선 보기 어려운 새”라면서 “작은누리가 없었다면 시내에 지빠귀가 날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나비들도 계속 날아오고 가을이 되면 참새들이 수십마리씩 몰려온다. ‘작은누리’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녹지가 부족해 사막처럼 되어가는 도시에서 생태 디딤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네스코 김승윤 팀장은 “주변에 중국대사관, 명동성당의 작은 숲, 반경 1.5km 이내에 남산이 있어 ‘작은누리’가 자연스럽게 동식물의 생태적 연결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은 유네스코 ‘인간과 생물권 계획 (MAB)’의 ‘생물권 보전지역 (Biosphere Reserve)’개념을 인공 녹지에 적용한 세계 첫 사례다. 보전가치가 있는 생태계를 △핵심지역(사람의 접근을 통제하고 야생과 가깝게 보전) △완충지역(환경교육과 관찰, 모니터링이 이뤄지는 곳) △전이지역(휴식과 관찰, 채소 재배 등이 이뤄지는 곳)으로 나눈 개념을 그대로 적용해 각각 야생덤불숲, 풀꽃동산, 텃밭을 만들었다. 핵심지역 가운데에는 습지 연못도 파놓았다. 사람의 간섭을 최소화하기 위해 평일 낮 12시∼오후 2시에만 개방하며 그나마도 핵심지역의 접근은 통제하고 있다.

○스스로 자라는 숲

서울 시내 한 복판의 11층 건물 옥상에 만들어진 ‘작은누리’. 대양의 섬처럼,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고요하고 깊은 도심의 생태 녹지다.-강병기기자

겉으로 볼 땐 고요해도 이 작은 생태계의 생명력은 다이내믹하다. 핵심지역에 서 있는 버드나무와 플라타너스는 심은 게 아니라 곤충 서식지로 쓰이도록 토막을 갖다놓은 것인데 뿌리가 나서 1년여 만에 사람 키보다 높게 자라버렸다. 1년 전에 2개밖에 없었다던 애기부들은 지금은 습지를 온통 뒤덮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 주변은 거의 정글처럼 울창하게 덤불이 우거져 있다. 일부러 풀어놓은 것도 아닌데 흙에 유충이 묻어온 것인지 습지 안엔 물달팽이, 우렁이, 소금쟁이들이 살고 있다.

‘작은누리’는 스스로 자라는 숲을 보여주는 미니어처이기도 하다. 요즘 이곳에는 돌콩, 자귀풀, 차풀, 칡넝쿨처럼 콩과 식물들이 무성하다. 숲연구소 이미옥씨는 이를 두고 “숲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농부들이 밭이 척박해지면 휴작을 한 뒤 콩을 먼저 심고 다른 작물들을 심듯, 콩과식물들의 뿌리속 박테리아에는 질소고정능력이 있어 땅을 기름지게 해준다. 콩과식물들이 척박한 땅을 옥토로 만들면 큰 나무들이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 숲의 성장과정. 현재 느릅나무가 2.5m까지 자란 ‘작은누리’에서 나무들이 얼마나 높이 자랄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과제다. 대기오염에 약한 토종식물을 제치고 미국 가마사리, 돼지풀처럼 공해에 강한 외지식물들의 번식이 왕성한 것도 요즘 관찰되는 특징들.

유네스코 김 팀장은 “여건만 만들어주면 자라는 것은 식물의 몫이었다”고 한다. 처음 만들 때 퇴비를 깔아준 뒤 가뭄 때 물 공급을 해주고 지나치게 번식한 잡초를 가끔 솎아주는 것이 관리의 전부다.

이곳의 식물은 빗물과 햇볕을 자양분 삼아 제 몸을 키우고 계절이 되면 낙엽을 떨어뜨려 스스로 비료를 생성하며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 한 방문객이 방명록에 남긴 말처럼, ‘작지만 큰 누리’이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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