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19년(1882년) 뜻하지 않은 구식(舊式)군대의 쿠데타는 노정객 흥선대원군의 ‘33일 천하’를 열었다.
개화(開化)의 거센 파고에 밀려 고종 집권 초기 ‘10년 세도’를 접은 지 어언 8년. ‘권력의 아귀’가 든 대원군의 심사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임오군란의 와중에 행방을 감춘 명성황후의 국상(國喪)을 서둘렀다. 시신을 찾을 수 없자 명성황후의 옷을 시신삼아 염을 한 뒤 관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대원군은 청국군에 납치된다. 그 배후에는 궁녀로 변복하고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달아났던 명성황후가 있었다.
겨우(?) 4500명의 병력을 끌고 온 청의 우창칭은 조선을 ‘속국’으로 접수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19세기 말 서구열강에 온갖 수탈을 당해온 청이었으나 조선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새파란 청년장교 위안스카이를 파견해 조선의 내정에 일일이 간섭했으니 볼썽사나운 ‘때국(大國)놈’의 작태였다.
우창칭의 꾐에 속아 가마에 처박힌 채 톈진으로 끌려가야 했던 대원군.
그는 오랜 유폐생활을 견뎌야 했다. 유배지 아닌 유배지에서 보낸 친서는 처연하다. “내 나이 칠십에 긴 밤을 당해 음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대원군은 4년 만에 한양으로 돌아온다. 운현궁에 갇혀 지냈으나 그 질긴 정치생명은 다함이 없었다. 이태 뒤 위안스카이와 손잡고 재집권을 도모했으나 실패했다.
개화파와 수구파, 대원군과 명성황후 일파가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외세를 끌어들이는 동안 조선왕조는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조선의 근대(近代)는 동이 트기도 전에 짓밟혔다. 백성들은 근대국가의 국민으로 거듭날 새도 없이 ‘천황 폐하의 신민’으로 전락해 갔다.
대원군의 ‘쇄국(鎖國) 10년’은 우리 역사의 블랙홀로 남았다. 그 공백은 컸다.
그는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살아와도 용서할 수 없다”고 했으나 시대의 흐름을 놓친 위민(爲民)과 부국강병 정책은 빛이 바랬다.
허나 당시 대원군이 표방했던 ‘함여유신(咸與維新)’은 꼬박 한 세기가 지나 ‘10월 유신’의 옷을 갈아입고 부활했으니!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하는 것, 그것은 권력의 오래된 유혹이다.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