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맛이야’. ‘무서운 신인’ 정지현(21·한국체대)이 26일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0kg급에서 따낸 금메달을 깨물어보고 있다. 아테네=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김)인섭이 형, 원수를 내가 갚았어요.”
26일 아노리오시아홀에서 열린 2004 아테네 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0kg급 결승전. 2명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꺾고 결승에 오른 ‘깜짝 스타’ 정지현(21·한국체대)에겐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상대는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2위인 로베르토 몬존(쿠바). 어깨를 맞대고 두 손을 마주한 채 벌이는 지루한 탐색전 끝에 정지현이 먼저 패시브를 받았으나 방어에 성공. 기회는 1라운드 1분58초에 왔다. 정지현은 몬존이 패시브를 받자 전광석화같이 옆굴리기에 성공한 데 이어 안아돌리기로 1점씩을 보태 2-0의 리드를 잡았다.
이어 2라운드는 지키기에 주력하다 그대로 3분의 시간이 흘렀고 정지현은 승리를 위한 최소 점수인 3점을 올리지 못해 연장에 들어간 뒤 불과 8초 만에 백포인트로 한점을 추가해 3-0의 완승을 따냈다.
메달에 목말랐던 한국에 23일 탁구 남자 단식에서 우승한 유승민에 이어 사흘 만에 금메달을 안긴 순간이었다. 전날 그레코로만형 간판스타인 김인섭(66kg)과 임대원(55kg·이상 삼성생명)의 동반 탈락으로 침체에 빠졌던 레슬링으로서도 활력을 찾은 하루.
정지현은 앞서 열린 준결승에선 4년 전 시드니 올림픽 결승전에서 부상투혼의 김인섭에게 통한의 눈물을 안겼던 세계 최강 아르멘 나자리안(불가리아)을 상대로 3-1로 승리하는 감격을 누렸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52kg급)에 이어 시드니 올림픽(58kg급)에서 2연패에 성공한 나자리안은 당시 손가락과 왼쪽 늑골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으로 진통제를 맞고 싸웠던 김인섭에게 3점을 먼저 허용했지만 부상 부위인 늑골을 집중 공략한 끝에 폴로 역전승을 거뒀다.
이번 대회에선 김인섭이 66kg급으로 올려 재대결은 무산됐지만 아테네 올림픽이 마지막 무대였던 김인섭이 전날 8강전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으며 쓸쓸하게 무대를 떠난 터라 정지현의 결의는 더욱 강했다.
한편 정지현은 예선 첫 경기에선 96년 애틀랜타 62kg급 금메달리스트 블로지미에르즈 자바즈키(폴란드)를 10-2로 완파했었다.
아테네=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
●입문 3년만에 태극마크… 체급 올린후 무서운 성장
아테네 올림픽 레슬링 최대 이변으로 꼽히는 정지현의 금메달. 하지만 그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될성부른 떡잎’이다.
유도를 하다 불곡중 3학년이 돼서야 비로소 레슬링에 입문한 늦깎이이지만 서현고 3학년 때인 2001년 겨울 까까머리 고교생 신분으로 단숨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2002년 그레코로만형 55kg급 대표 최종 선발전에선 심권호를 꺾고 올라온 하태연을 제압하고 부산아시아경기 대표로 선발된 유망주. 이 대회에서 비록 예선 탈락했지만 이때부터 ‘무서운 신예’로 자리 잡았다. 이후 체급을 60kg급으로 올려 5월 아시아선수권에선 우승을 차지했다. 메어넘기기와 측면들기가 특기. 경험부족으로 인한 경기운영 미숙이 지적됐지만 몸이 유연하고 하체가 강한 것이 장점이다. 틈만 나면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신세대.
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
▼2차전때 오심… 즉각 항의해 탈락 막아
국제체조경기연맹(FIG)이 양태영(24·경북체육회)에 대한 오심을 인정하면서도 판정번복 불가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가운데 레슬링의 정지현(21·한국체대)은 현장에서 오심을 바로잡았다.
정지현은 26일 아테네 아노리오시아홀에서 열린 그레코로만형 60kg급 1조 리그 비탈리 라히모프(아제르바이잔)와의 2차전에서 판정번복을 이끌어내 자칫하면 날릴 뻔한 승리를 지켰다.
정지현이 2-0으로 앞선 1라운드 종료 직전. 파테르 자세에서 공격을 하던 정지현은 라히모프의 역습을 허용해 밑에 깔리면서 양 어깨가 매트에 동시에 닿아 폴로 질 위기를 맞았고 주심은 라히모프에게 3점을 줘 2-3으로 뒤집혔다.
이때 안한봉 감독이 뛰어올라 “라히모프의 발이 매트 밖으로 나갔다”며 주심에게 강력하게 항의했고 심판장은 1라운드가 끝난 뒤 비디오 판독 지시를 내렸다.
결국 심판장은 라히모프의 점수를 인정하지 않았고 정지현은 2-0의 리드를 유지한 채 연장전에 들어가 1점을 보태 3-0으로 승리했다.
배창근 총감독은 “레슬링은 워낙 스피디하게 경기가 진행되는 데다 같은 기술이라도 상황에 따라 점수가 다른 경우가 많아 심판장이 비디오 판독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돼 있다”며 “그래도 항의가 수용돼 판정번복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아주 드문 경우”라고 설명했다.
아테네=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