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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카페][책의향기]‘수유리…’ 펴낸 김이환 관장

입력 | 2004-08-27 17:25:00

연합


“선생님 흑모란이 갖고 싶어 왔습니다.” 선생은 씨익 웃었다. 반긴다는 듯한 가냘픈 미소였다. 그리고 한 마디, “기려(그려)주지.”

경기 용인시 기흥읍 이영미술관 김이환 관장(69·사진)이 내고 박생광(乃古 朴生光·1904∼1985) 화백을 처음 만났을 때의 회고담이다. 1977년 6월 초순이니, 김 관장이 마흔 셋, 박 화백이 일흔 셋이었다. 당시 박 화백은 샤머니즘과 불교, 무속, 민속적 이미지를 주조로 우리가 잊고 있던 전통적 색채 미감을 현대화로 끌어온 거장이라는 평을 듣고 있었지만, 정작 가난하고 외로웠다.

김 관장은 올해 내고 탄생 100주년을 맞아 최근 펴낸 ‘수유리 가는 길, 민족혼의 화가 박생광 이야기’(이영미술관·271쪽·1만5000원)에서 “박 화백은 가난이 인테리어가 된 그 방에서 바지의 허리춤을 배배 꼬인 넥타이로 묶고 그림을 ‘기리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박 화백을 팬으로 만나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기까지 두 사람의 인연이 이 책에서 잔잔하게 펼쳐진다. 그간 밝혀지지 않았던 박 화백의 일본 활동시절 이야기와 일본 미술잡지에 소개된 그의 그림들도 담겼다. 아울러 한국으로 돌아온 초기부터 전성기로 평가받는 1981∼1985년 채색화 시기까지 연대별 작품들도 에피소드 중심으로 보기 편하게 소개됐다.

저자는 고인이 된 박 화백의 작품과 삶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명성황후’(내고의 작품)가 내 집에 들어온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400호 병풍을 마루에 세우고 펼치는 데 극락이 따로 있을까 싶었어요. 가까이서 보고, 뒷걸음질쳐 보고, 밤도 없고 낮도 없이 보았지요. 지하실로 옮겨 놓고는 한밤중에 몰래 내려가 화면 구석을 꼼꼼히 들여다보기도 했고요. 그러면, 내고가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내게 ‘그림 괜찮제, 괜찮제?’ 하고 소곤거리는 듯해요. 그럼 나는 ‘좋고말고요. 선생님’ 하고 중얼거리죠.”

대기업 임원으로 정년퇴임한 김 관장이 현재 내고의 작품 100여점을 소장 전시하는 사립미술관장이 되었으니 박 화백은 그의 운명까지 바꿔놓은 셈이다. 그는 환갑의 나이에 일본 와세다대학원에서 수학하며 내고의 일본 시절을 연구하기도 했다.

김 관장은 미술관 운영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면서도 내고 이야기만 나오면 활력이 넘쳐났다. 그는 “지루하기 십상인 노년에 이렇게 몰두할 ‘거리’를 만들어 주었으니 내고가 정말 고마운 분”이라고 말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