彭城에 깃드는 어둠(9)
“이 잔꾀 덩어리가 또 수작을 부리는구나. 지난번에도 글을 올려 유방은 결코 동쪽으로 돌아올 마음이 없다고 과인을 속이더니, 이제 유방이 이미 관중을 차지하고 동쪽으로 나올 뜻을 분명히 하였는데 아직도 간사한 꾀로 거짓을 늘어놓다니. 내 먼저 한성(韓成)을 죽이고, 다시 이 오래 묵은 여우를 잡아 가마솥에 삶으리라!”
장량의 글을 읽고 난 항왕은 그러면서 오히려 한왕 성을 죽일 뜻을 굳혔다. 하지만 급변하는 동북(東北)의 형세가 항왕의 눈길을 끄는 바람에 결행은 잠시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먼저 항왕을 혼란케 한 것은 연(燕)나라의 변고였다. 홍문에서 천하를 나눠줄 때 전 연왕(燕王) 한광(韓廣)은 진나라를 쳐 없애는 데 세운 공이 없어 요동왕(遼東王)으로 밀려나고, 연왕은 항왕을 따라 입관(入關)하여 큰 공을 세운 장도(臧도)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한광이 봉지(封地)인 요동으로 가려 하지 않자 새 연왕 장도는 한광을 공격해 죽이고 그 땅까지 아울러 버렸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장도가 비록 심복이라 하나, 그래도 자신이 제후로 세운 한광을 함부로 죽이고 또 자신이 나눠준 봉토를 힘으로 가로챈 일은 크게 항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부글거리는 속을 누르고 어떻게 죄를 물을까 궁리하고 있는데, 다시 범증이 좋지 않은 소식을 알려주었다.
“아무래도 제(齊)나라를 차지한 전영과 왕이 못돼 앙앙불락인 진여가 하는 짓이 심상치 않습니다. 진여는 대왕께 받은 세 현(縣)을 참빗으로 쓸 듯 장정을 긁어모으고, 전영은 적지 않은 제나라 군사를 보내 그런 진여에게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리하여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를 내쫓고, 지금 대왕(代王)으로 있는 전 조왕(趙王)을 되세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옛 제나라와 조나라가 손을 잡은 꼴이요, 전영은 진여를 도와 세력을 배로 키운 셈이니 그냥 보고만 있을 일이 아닌 듯합니다.”
내용은 장량이 올린 글과 비슷했으나 범증이 말하니 항왕에게는 사뭇 다르게 들렸다. 한왕 유방과 서북쪽 관중(關中)으로만 쏠려 있던 의심과 걱정이 일시에 동북으로 돌아섰다.
(내 멀리 있는 유방을 걱정하느라 발밑을 파고 있는 전영의 분탕질을 너무 오래 방치하였구나. 아무래도 아니 되겠다. 대군을 내어 동북쪽부터 안정시키자. 스스로 제왕(齊王)이 된 전영을 목 베고 그 무리를 모조리 산 채 땅에 묻어버리면 유방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어쩌면 절로 겁을 먹고 저 홍문(鴻門)에서처럼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내 발아래로 기어들지도 모른다.)
마침내 항왕은 그렇게 뜻을 정했다. 하지만 그래놓고 나니 다시 팽성 안의 일들에 새삼 마음이 쓰였다. 점점 변해가는 민심이 슬며시 걱정스러웠고, 특히 진작 장사(長沙) 침현(*縣)을 근기(近畿)로 받고도 아직 평성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의제(義帝)는 안에서 심장을 겨누고 있는 비수라도 되는 듯했다.
한성(韓成)과 장량의 일도 항왕이 동북으로 대군을 이끌고 떠나기 전에 처결되어야 했다. 믿을 만한 정창을 왕으로 삼아 한(韓)나라를 맡겼으니, 한성이 옛 왕족과 신하들을 꼬드기거나 장량이 잔꾀만 부리지 않으면 무관(武關)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리되기 위해서는 한성과 장량을 죽여 없애는 게 상책이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