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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살아보니]릴 바비커 칼리파/영어, 관심만큼 연습은 안하네요

입력 | 2004-08-27 18:59:00


나는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20여년 동안 10여개국에서 살았다. 그 중 비이슬람권 국가에 살 때 신경이 쓰이는 점은 나의 외모,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헤자브’ 차림이다. 아프리카 수단 출신으로 이슬람 신자인 나는 외출할 때 반드시 ‘헤자브’라고 불리는 스카프를 머리에 쓴다.

2002년 아버지가 한국 주재 수단대사로 임명됐을 때도 그랬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이 나라에서 ‘헤자브’ 때문에 원치 않은 시선을 받을까봐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이것은 괜한 걱정이었음이 드러났다. 이슬람 종교와 문화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해는 깊었다. 헤자브를 쓰고 처음 학교에 나타났을 때 다른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기는 했지만 나의 외모가 한국 친구들과 사귀는 데 방해가 된 적은 없었다. 도서관, 음식점 등에서 나의 헤자브 차림을 보고 이슬람에 대해 물어오는 한국인도 많았다. 중동 정세가 불안해지고 이라크 파병이 사회 이슈가 되면서 이슬람을 알고자 하는 관심이 크게 늘어난 듯했다. 한국의 국제화 노력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앞서갔다.

그러나 국제화 수준에서 실망스러운 점도 있었다. 그것은 언어적 불편함이었다. 물론 전 국민이 영어를 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국과 같이 올림픽, 월드컵 등 국제행사를 많이 치르고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힘쓰는 나라에서 영어 소통이 이 정도로 힘들다는 것은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우리 집 요리사가 손가락을 크게 베어서 근처에 있는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건만 그곳에는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간호사가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동안 나와 요리사는 속수무책으로 기다려야 했다. 병원 학교 공공기관 등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장소에 통역담당 직원을 둔다면 한국에 대한 인상이 금방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한국인들의 영어학습 패턴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영어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과 열의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실력만큼 겉으로 표현하고 연습하는 데는 인색하다.

나 역시 언어를 배우는 데에 따르는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외국에서 태어난 나는 1997년 처음 고향 수단에 돌아갔을 때 아랍어를 몰라 쩔쩔맸다. 아랍어는 나의 모국어인지라 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창피함은 더욱 컸다. 나는 수단인들에게서 아랍어를 배우면서 ‘언어는 연습’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 한국인들도 완벽한 영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고민에서 일단 벗어난다면 자신의 영어 잠재력을 실현하는 길의 절반 정도는 온 것이 아닐까.

▼약력▼

1982년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외교관인 아버지 바비커 알리 칼리파를 따라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케냐 프랑스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버지가 주한 수단대사에 임명되면서 한국에 왔다.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내의 토론클럽 ‘디베이팅 소사이어티’의 열성 회원이다.

릴 바비커 칼리파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