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허드렛일은 대부분 스리랑카인이 한다.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레바논의 네 배인 이스라엘로 가면 풍경이 달라진다. 갈릴리 지역 호텔 잡역부의 다수가 레바논인이다.
‘타타르로 가는 길’의 저자인 미국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 그는 1990년대 말 중동에서 목격한 이 모습을 국력, 특히 경제력이 ‘개인의 삶과 값’에 미치는 영향을 소개하는 사례로 들었다.
렌즈를 좀 더 당겨보자. 필리핀은 1960년대만 해도 한국이 선망하는 나라였다. 하지만 무능하고 비전 없는 정권이 이어지면서 급전직하했다. 변변한 제조업체도 없다.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은 일본 등 해외로 돈벌러 나간 국민이 보내오는 송금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시대를 거꾸로 살아오신 분들이 득세하는 역사가 계속되는 한 (1인당 소득) 3만달러를 어떻게 갈 수 있으며, 가면 뭐하느냐”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엿볼 수 있다.
대통령의 말은 부분적으로 옳다. 우리 현대사는 적잖은 왜곡과 굴절을 겪었다. 하지만 그것이 총체적 진실일까.
체제나 정권의 궁극적 정당성은 의도가 아니라 결과가 결정한다. 국민의 삶을 힘들게 하고 국가 위상을 추락시키는 권력을 만나는 것만큼 불운과 비극은 없다. 이 땅의 주사파가 동경하는 북한 정권은 수백만명의 백성을 굶겨 죽인 실패만으로도 용납하기 어렵다. 반면 ‘광복 후 한국’은 비록 그늘은 있었지만 ‘절반 이상의 성공’이었다.
국정 운영에서 근본주의와 독선에 바탕을 둔 이분법적 사고는 위험하다. 냉철한 현실 인식과 사회심리학적 통찰까지 필요한 경제와 외교는 더 그렇다. 현 정권 들어 유난히 이 두 분야가 삐걱거리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제대로 틀을 갖춘 나라라면 모두 미래를 보고 달려가는 세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가 가장 싫어하는 불확실성을 권력이 전면에 나서 부추기고 있다. “거꾸로 된 세상에서 3만달러를 가면 뭐하느냐”는 주장이 먹혀드는 나라는 그나마 이뤄놓은 1만달러도 지키기 어렵다.
‘뜨거운 가슴, 차가운 머리’를 강조한 영국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은 경고했다. “삶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이 갑작스럽고 폭력적 형태로 재조직될 때 그 결과가 개선보다 개악에 가까우리라는 것은 인내심 있는 경제학자라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많은 경제학자는 한국이 ‘궁핍화의 터널’로 들어가고 있다고 걱정한다. 몇 개 기업이 분투하지만 전반적인 성장 엔진은 꺼지고 있다. 자본과 공장의 해외탈출이 늘어나고 일자리는 줄어든다. 세금과 연금 등 국민 부담과 국가 채무는 급증세다. 물가까지 감안한 실질소득이 매년 마이너스인 국민이 한둘이 아니다. 서민의 고통이 특히 심하다.
누군들 희망을 말하고 싶지 않으랴. 하지만 갈 길 바쁜 21세기에 시장경제를 거듭 강조해야 할 만큼 반(反)시장적 좌파 이념이 득세하는 나라. 집권세력이 정략적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내부 투쟁에 골몰하는 나라에서 장밋빛 희망을 노래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허위의식이다.
요즘 시중에는 “이대로 가면 한국인이 중국인의 발 마사지를 해주면서 살아야 할 날이 온다”는 섬뜩한 농담이 퍼져가고 있다. 레바논의 스리랑카인, 이스라엘의 레바논인, 일본의 필리핀인이 자꾸 머리에 떠오른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