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느니 걱정 소리다. ‘뭘 먹고 사나, 애들은 어떻게 키우나’부터 ‘피땀 어린 내 돈 안 뺏기겠나, 빨갱이 세상 되는 건 아닌가’까지.
걱정의 밑바닥엔 현 정권의 유전자(遺傳子)에 대한 의문이 깔려 있다. 한나라당이 정권의 정체(正體)를 따지자 청와대는 ‘헌법이 정체’라고 했다. 순진하게 풀이하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북돋우고, 법치를 통해 국민의 행복권을 지켜주는,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쯤 될 터이다. 그런데 왜 국민 속의 의심은 커지나.
▼‘대한민국’ 체제 흔들리나▼
해외 일각에선 정권 초기부터 좌파라고 했지만 국내에선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사람이 그래도 많았다. 4·15총선을 거치면서 관료들 사이에서 ‘왼쪽이라는 불신을 사지 말아야 한다’는 완곡한 걱정이 새나왔다. 이 무렵 정부는 좌파가 아니라 개혁파라고 불러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국내의 진단도 상당히 직설적으로 변해왔다. 안국신 중앙대 교수는 이달 중순 국제학술대회에서 “참여정부는 좌파정권이고 좌파적 가치의 덫에 걸려 있다. 좌파정권에선 여론몰이와 대중영합적 정책들이 출몰하고 경제는 뒷전인 채 정치제일주의가 횡행한다”고 했다. 그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힘의 균형을 맞추고 모두 잘살자는 좌파 가치는 사회주의 실험에서 이미 실패한 이념”이라고 덧붙였다. 이헌재 경제부총리도 같은 자리에서 반(反)시장적 근본주의적 목소리가 커지는 걸 우려했다.
이재웅 한국경제학회 차기 회장은 그제 “시장경제체제와 교육의 붕괴가 경제 위기의 근본원인”이라며 “한국사회가 분배와 복지, 형평 등을 강조하는 좌파적 가치에 몰두하면서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추락하고 있다”고 짚었다. 정권 핵심부는 가만히 있는데 경제학자들이 엉뚱한 소리를 하고, 경제부총리까지 부화뇌동한다고 믿는 국민이 더 많을까.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받았던 안영근 열린우리당 제2정책조정위원장은 “우리 사회에 골수 주체사상파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한때 사회주의운동을 했다는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는 “김일성을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이라 부르던 친북좌익 주사파가 현 정권 중추세력인 386의 다수를 점하고 있다”고 했다. 운동권 간부 출신의 한 여당 의원은 미국의 북한인권법에 대한 저지운동을 주도하면서 “미국 때문에 북한 주민이 굶는다”고 주장한다.
시장주의를 말하면 반(反)개혁으로 모는 여권(與圈) 일부세력은 자신들의 ‘이념’이 경제와 민생 회복의 중대한 걸림돌임을 인정할 가능성이 있을까. 또 주사파 출신 등이 대외관계에서 국가안보에 역행하는 선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보다 근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로 집약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민족사의 정통성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역사인식’이 부정되는 상황에 온 국민이 직면하는 건 아닐까.
아무튼 이들에게 국가운명을 맡겨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이 큰일 나겠다고 걱정하는 국민이라면 자구(自救)의 행동에 모두 나서야 한다. 나라가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면 언론도, 기업계도, 지식인도, 원로도, 헌법재판소도, 법원도, 정치권도, 다른 제도권도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침묵하는 다수도 생각이 같다면 함께 목소리를 내고 여론으로 응원해야 한다. 어떤 정권도 대한민국을 흔들 수는 없음을 보여줘야 한다.
▼객석에서 일어나 自救행동을▼
정권으로부터 기득층이라고 죄인 취급 받는 사람들에겐 반성할 점도 많다. 체제 속에 안주해 나의 이익 취하기에 급했지, 우월한 체제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투자와 교육은 소홀히 해왔다. 해외에 나가 보면 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한 신생국 가운데 우리가 얼마나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는지 쉽게 알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가난이 자본주의 탓’이라는 인식을 걷어내지 못했다.
기다릴 시간이 없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서로 ‘당신이 좀 잘 해줘’ 하며 뒷전으로 숨어서는 안 된다. 이 마당에 이르러 무임승차를 꿈꾼다고 될 일인가.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