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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채연석/이제 누가 보라호를 날게할까

입력 | 2004-08-30 18:52:00


27일 ‘보라호’ 시험비행 추락이라는 예기치 않은 비보를 접하면서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 4일 전 고 황명신 교수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보라호 비행의 의의에 대해 얘기를 나눴는데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두 교수가 비행성능 시험을 하던 보라호는 비행위험도를 크게 줄인 최신식 비행기였다는 점에서 추락의 충격은 더욱 컸다. 보라호는 100% 국산 복합재료를 사용했고 세계 최초로 소형항공기에 전진익 형상을 적용한 첨단 혁신 항공기였다. 6월 19일 이미 초도비행에 성공한 뒤 이번이 4번째 비행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추락사한 두 교수의 열정▼

이번 추락은 항공기의 시험비행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기도 했다. 1903년 라이트 형제에 의해 항공기가 개발된 지 이미 10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 항공기의 기술개발과 운용에 있어서는 위험 부담이 많다. 그 중에서도 시험비행은 위험성이 가장 크며, 따라서 항공에 대한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정부에서는 목숨을 바쳐 헌신한 과학자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과학기술훈장을 추서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과 업적을 추모하는 수준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우선 정부는 그들이 못 다 이룬 꿈을 후배들이 이어받을 수 있도록 전용 비행시험센터 건립, 시험비행사 양성 등 제반 인프라 구축에 적극 나서주기를 당부한다. 아울러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힘쓴 유공 과학기술자 묘역을 조성해 새로운 세대에 표상이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대책은 항공학계, 더 나아가서는 이공계 비인기 분야의 지원을 확대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공계 지원이 다양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한다.

사실 컴퓨터, 생명공학, 나노기술, 환경공학 등 몇몇 각광받는 이공계 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매우 인색하다. 지원이 결정됐다 하더라도 지원금이 실제 집행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한두 달 차이로 세계적인 기술격차가 결정되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늑장 지원은 관련 연구학자들에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항공학계에 대한 지원 역시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민간개발 항공기의 시험비행은 전용 비행장이 없어 항공대 훈련시설을 빌려서 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져 왔다. 아파트 단지 위를 날아야 하는 위험한 비행을 자청하다 유명을 달리한 과학자들의 열정만으로 국산항공기 연구가 여기까지 왔지만 언제까지 이들의 열정만으로 과학 개발을 할 수 있겠는가.

과학기술 분야의 새로운 인재를 찾아내려는 정부의 노력도 필요하다. 세계적인 지명도를 확보한 과학자들의 연구를 계속 지원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도 이름 없는 연구소에서 재정난과 싸워가며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자들이 훨씬 많지 않은가. 이들의 연구의욕을 꺾지 않으려면 국가는 과학기술 연구 과제를 수립할 때 지금과 같은 폐쇄성에서 벗어나 좀 더 다양하게 과학자들의 의견을 듣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전용비행장 없는 항공학계▼

다만 이번 사태가 새로운 과학기술 시험을 그만두게 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처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선 안 된다. 새로운 과학기술의 성능을 알기 위해서는 끝없는 시험과 수정이 필요하다. 위험하다고 해서 정부가 새로운 과학기술 시험에 제재를 가한다면 기술 발전을 이룰 수 없다. 벌써부터 정부 관련부처에서는 일부 시험비행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할 일은 시험을 중단시키기보다 안전한 시험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반시설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두 분 교수님. 이제 남아 있는 가족들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편히 가십시오. 그렇게도 날고 싶어 하던 하늘에서 날고 싶을 때까지 맘껏 날아 보시기 바랍니다.”

채연석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