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영화인
어떤 작품부터 얘기를 꺼내야 하나.
할리우드 연기파의 대명사 로버트 드니로의 대표작은 선뜻 고르기가 힘들 만큼 굉장히 많다. 그는 정말 좋은 영화에서 기막힌 연기를 선보여 왔다. 어떤 사람들은 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부터 얘기하지 않을까.
한때 노예 사냥꾼이었던 남자가 속죄를 위해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잔뜩 짊어지고 폭포계곡을 오르던 장면이 생각난다. 오히려 그의 사냥 먹잇감들이었던 원주민들이 보다 못해 짐을 메고 있던 밧줄을 끊어버리면 다시 밑으로 내려가 고집스럽게 그걸 끌고 올라간다. 결국 정상에 다 올라 또 다른 원주민이 그 밧줄을 다시 끊어주자 이제야 드디어 악연의 사슬을 끊어냈다는 듯 남자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기묘한 표정으로 흐느끼기 시작한다. ‘미션’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자 드니로의 연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역작 ‘디어 헌터’를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배경 음악으로 ‘카바티나’가 흐르고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친구 생각에 방구석에서 고민하는 병사의 모습이 기억난다. 마틴 스코시즈의 ‘비열한 거리’도 빼놓을 수 없겠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절대 지나쳐선 안 될, 드니로의 대표작일 것이다. 애드리언 라인이 만든 ‘앤젤 하트’에서 손톱을 하얗게 기르고 삶은 계란의 껍질을 톡톡 두드려 살며시 벗겨내서는 스윽 한 입 베어 먹는 악마의 역할은 또 어떤가. 모두 드니로 표 연기다. 드니로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인 것이다.
최근작에서는 마이클 만 감독의 ‘히트’가 최고였다. 할리우드에서 그와 늘 쌍벽을 이루는 알 파치노가 처음으로 같이 나온 영화여서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드니로는 여기서 염세적이고 냉소적인, 그러면서도 매우 지적이고 ‘젠틀’한 범죄자로 나왔다. ‘히트’에서 드니로와 알 파치노가 벌였던 거리 총격 신은 할리우드 영화사상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장면이다. 한 마디로 ‘히트’ 중의 히트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드니로도 계속 범작(凡作)만 해대고 있다. 이제 그의 나이도 60세가 넘었다. 나이와 지나친 다작으로 새로운 연기의 틀을 개발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이 매너리즘을 넘어달라는 게 그를 지지했던 오랜 팬들의 마지막 희망 아닐까. 1998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과 ‘재키 브라운’을 찍고 난 뒤의 작품들, ‘애널라이즈 디스’ ‘미트 페어런츠’ ‘스코어’ ‘쇼타임’ 등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살짝 지우고 싶은 작품들이다.
이번에 개봉되는 ‘갓센드’도 안타깝지만 같은 범주에 들어가야 할 작품이다.
‘갓센드’는 영어 제목 ‘God send’로 알 수 있듯이 신의 영역이었던 생명 탄생의 문제를 인간이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곧 복제인간을 만들어내면서 벌어지는 공포와 미스터리의 이야기다. 애지중지했던 여덟 살 난 아들을 잃은 부모가 있다. 산부인과 의사이자 과학자라는 남자가 이들 부부를 찾아와 아들의 세포를 복제해 똑같은 아이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의 권유대로 부부는 아들을 ‘부활’시키지만 이 복제아들이 마침내 8세가 되면서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한다는 얘기다.
첨단과학의 얘기를 소재로 가장 비과학적인 줄거리를 따라가는 ‘갓센드’는 정작 유전공학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다음 세대의 운명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거둘 수 없는 미국 내 현 중산층 가정의 히스테리 같은 것이 영화 내내 느껴진다. 그건 뭐, 그나마 이 영화를 좋게 얘기하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 작품이 최근 줄기세포의 연구마저 금지하게 한 ‘무식한’ 부시 정부의 홍보영화 같다고 비웃는다. 줄기세포 복제의 창시자인 황우석 박사도 이 영화의 시사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여기저기 매체를 뒤져봐도 황 박사의 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렴. 황 박사도 할 말을 잃었을 것이다. 3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 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