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개혁가는 정조(正祖)와 대원군(大院君)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에 만들고 자주 찾았다. 한 달에 20여 차례나 사도세자 능을 찾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꽤 먼 거리를 매일 행차했던 셈이다. 정조의 효성이 극진하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궁궐 안에만 있으면 민심을 파악할 수 없으므로 밖으로 나가기 위함이었다.
▼개혁가 正祖의 ‘민생 챙기기’▼
조선시대에는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서민들이 임금이 지나는 길에서 꽹과리를 두드려 행차를 멈추게 한 뒤 사정을 호소하는 것이다. 정조가 직접 판결을 내린 격쟁이 1300여건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민심에 귀 기울이려 했는지 알 수 있다.
대원군 역시 민심에 꽤나 촉각을 세웠던 것 같다. 조선후기 최대의 공사였다는 경복궁 중건(重建) 사업으로 백성의 원성을 샀던 그는 2차 집권을 하자마자 경복궁 수리작업부터 중단시켰다. 경복궁은 완공 후에도 계속 보수작업이 요구되고 노동력이 동원됐는데 대원군은 민심이 두려웠던 것이다. 개혁정책을 펴려면 민심과 민생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들은 잘 깨닫고 있었다.
지난 1년 반 노무현 정부의 ‘개혁’은 도무지 종잡기 어렵다. 집권 초기엔 미래를 강조하더니 어느새 방향을 바꿔 온통 과거에만 매달려 있다. 내세운 개혁과제의 종류도 많고 규모도 간단치 않다. 한정된 대통령 임기 내에 어떻게 다 처리하겠다는 건지 우선 믿음이 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과제들이 얼마나 민생에 부합되는가이다. 이런 질문에 정부가 단골로 내놓는 말이 ‘그럼 개혁하지 말자는 소리냐’는 것이지만 개혁에도 우선순위가 분명히 있다. 수도 이전만 해도 국민의 60%가 반대를 하고 있고 이로 인해 사회 전체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는 것은 민생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사에서 민심을 얻지 못한 개혁은 거의 실패로 끝난다. 추진력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30%에 머무는 것도 정부의 ‘개혁’이 민심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원인은 역시 ‘개혁 조급증’이다. 2006년에 지방선거가 있고 그 다음 해엔 대통령 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올내년 중에 빨리 성과를 내야 한다고 서두르는 것 같다. 하지만 융단폭격 퍼붓듯 개혁과제를 많이 내놓는다고 해서 민심이 따라와 주는 건 아니다. 길게 내다보고 차근차근 추진해 나가는 자세가 오히려 득(得)이 될 것이다.
이 틈에 서민의 생존이 걸린 가난의 문제가 간과되고 있는 것은 비극이다.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전기, 수도 요금을 내지 못하고 자녀들 도시락을 못 싸줄 형편이다. 서민을 위해 일한다는 정부가 빈곤 해결에 아무런 역할을 못하는 것만큼 모순은 없다.
경제난은 급기야 가족 단위를 붕괴시키는 사태로 확대되고 있다. 가족끼리 너무 똘똘 뭉쳐 문제였던 한국 사회의 한편에서 가족 해체가 가속되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생활고가 계속되면 가족의 정도 별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서민 정부’에서 붕괴되는 서민 가정▼
이혼이 급증하고 아이들은 방임되고 있다. ‘이혼 고아’를 포함한 빈곤 아동이 100만명을 헤아린다는 소식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가난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보여 줄 순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경제 불황은 참여정부 책임이 아니며 그러니까 분배를 잘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탁상공론만 되뇌고 있을 것인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을 보려 한다.”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의 명언이다. 정부의 실세와 386들은 ‘주류 교체’와 같은 실체 없는 이념논쟁과 ‘과거 한풀이’ 쪽에만 눈을 돌리고 있는 게 아닌지 궁금하다. 여권은 역사와 개혁을 말하기 이전에 ‘개혁은 서민의 의식(衣食)을 풍족히 하는 일’임을 간파한 개혁가들부터 살펴볼 일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