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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만나는 시]정진규, “아기 흰긴수염고래 ”

입력 | 2004-09-05 17:43:00


아기 흰긴수염고래

정진규

태어날 때부터 7미터의 몸길이와 4톤의 무게를 자랑한다는, 모든 飛潛走伏들이 쪽을 못 쓰는, 아기 흰긴수염고래는 하루에 3백80리터씩의 젖을 먹어야 하는데 그 젖이 반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그만큼 바다가 좁아졌다고 捕鯨船들이 바다를 바짝 조여놨다고 어미 흰긴수염고래가 수척한 몸으로 숨어 눈물 흘리고 있는 장면을 내셔널 지오그라피가 찍었다 어쩌나, 그만한 젖동냥은 꿈도 꿀 수가 없다 괜한 짓거리지 젖동냥 나서는 내 심봉사의 지팡이 소리가 잠깐 다급하다 만다 그게 웃기는 내 오지랖이다 그래도 그런 젖을 물릴 수 있는 여자를 찾아 나는 平生떠나야 할 것이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그런 식으로 나는 사랑을 믿어왔다 과장이 지워지면 그만큼 사랑도 지워진다 과장은 감동의 속살이다 사실의 힘이다

-시집 ‘本色’(천년의 시작) 중에서

주 : 시 가운데 飛潛走伏은 ‘비잠주복’이라 읽으며 ‘날고, 헤엄치고, 달리고, 엎드려 기는 것’이란 뜻. 조류 어류 육상동물 곤충을 망라한 것으로 ‘온갖 동물' 정도로 의역할 수 있음. 捕鯨船은 ‘포경선’

웃기는 오지랖이라니요. 저 딱한 이야기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왼쪽 가슴을 젖힐 뻔했다니까요. 명치께나 찌르르 하는 걸 보면 사내인 제게도 모성(母性)의 유전자가 얼마쯤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지팡인 여기 있어요. 한데 4t이나 되는 아기 흰긴수염고래를 어떻게 포대기 둘러업고 젖동냥 가시려는지? 나막신 달그락거리는 빙판길을요. 아아, 저도 나설게요. 세상 젖줄 다 바닥낸 우리 모두 심 봉사, 김 봉사, 박 봉사 아니겠어요?

각본을 알고 하는 말이지만요, 저 아기 흰긴수염고래만 살려낸다면 심 봉사님, 당신 눈만 틔우겠어요? 인당수가 제 집 안 마당이니께 세상 모든 까막눈, 애꾸눈, 돌부처, 해태 눈이라도 틔워주고 말겠지요. 공양미 삼천 석이라도 밑지는 장사 아니라니께요. 아얏! 알았어요. 저야말로 신(身)봉사만도 못한 심(心) 봉사라고요? 그나저나 저 불쌍한 아기 흰긴수염고래를 꼭 살려내야 할 텐데요, 젖보다 눈물부터 핑 도는 세상의 모든 젖어미들이여.

반칠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