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길(辛永吉·78·사진) 한국장서가협회 명예회장의 책에 대한 애정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기네스협회는 1993년 그가 소장한 책이 모두 5만5200권이라고 공식 확인했다. 좋은 책이 있다고 하면 아파트 한 채 값을 내놓고라도 사 모았을 정도다.
평생 ‘남’의 책만 모으는 데 진력했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에 관한 책을 냈다. ‘신영길이 밝히는 역사 현장’(지선당)이라는 회고록이다.
“올해 제 나이가 실제로는 80입니다. 어디서 제 운명을 감정해보니 2년 남짓 남았다고 하더군요. 삶의 종착역에서 제가 겪은 역사를 정리하는 책을 내고 싶었습니다.”
신 회장은 이 책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의 삶의 궤적을 세밀하게 정리했다. 평소 일기를 꾸준히 써온 그의 꼼꼼함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국립경찰 1기로 임용돼 경교장에서 경비를 서던 1946년 6월. 이승만 박사가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연설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교장에 모인 임정요인들의 격앙된 고함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민주당 당원이었던 그는 56년 대통령 선거 때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그 유명한 구호를 지었다. 공채시험으로 공무원이 된 뒤 겪은 ‘증권파동’의 내막도 밝혔고, 청와대 상황실에서 근무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서울 종로 뒷골목에서 막걸리를 함께 마신 얘기도 털어놨다. 그리고 1980년 재야인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주택은행 서울 서대문지점장이던 그는 석방탄원서를 썼고, 이로 인해 해임되기도 했다.
이후 그의 삶은 희귀본 서적, 백두산정계비와 간도, 독도, 녹둔도, 대마도 등 영토 관련 서적 및 자료, 그리고 일제강점기 사료 등을 모으는 일에 집중됐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남은 책은 별로 없다. 2002년 9월 광운대에 자신의 책들을 대부분 기증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1975년 통문관에서 구입한 ‘양휘산법’이라는 책은 아직 간직하고 있다.
“세종대왕 때 제16대 조부께서 지으신 책을 어렵게 구했죠. 다만 이를 연구하겠다는 학자가 나오면 제공할 뜻은 있어요.”
신 회장은 “나의 회고록이 단지 한 개인의 역사가 아니고 신영길이라는 사람이 살아온 한 세대의 역사라고 봐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