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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역할로 본 호주제 문제

입력 | 2004-09-06 17:46:00

장남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닌데도 집안의 온갖 부담을 떠맡는다. MBC 주말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 삼형제 중 첫째인 박상원은 공부를 가장 많이 했으나 동생들과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는 전형적인 ‘장남’이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서울대 한경혜 교수(소비자아동학부)가 남자대학생에게서 들은 요즘 농담 한 가지.

“그만 만나고 싶은 여자친구를 끊는 방법은? ‘나, 장남이야’라고 얘기한다. 그러면 여자의 90%는 정리된다.”

한 교수는 “장남 관련 스트레스를 표현한 것 같다”고 소개했다. 한 교수를 비롯한 연구팀이 여성부의 의뢰로 ‘한국남성이 경험하는 호주제의 의미’를 연구하기 위해 남성 12명을 심층 면접하는 가운데 나온 얘기다.》

○장남, 과중한 부담… 쥐꼬리 특권…

베스트셀러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에서 저자는 장남은 자라면서 다른 형제에 대해 끝없는 죄책감과 책임에 시달린다고 호소한다.-사진제공 명진출판

▽장남은 괴로워=노모를 간병하고 있는 장남 A씨(58·자영업)는 “나는 더 받은 것도 없는데 그렇게 역할이 주어졌다”며 “동생들은 전화 한번 없고 부모님께 소홀한 게 불만”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부모 부양은 장남이 아니라 능력 있는 자녀가 해야 한다는 인식전환도 나타난다.

차남인 B씨(47·회사원)는 “똑같은 자식이니까 능력에 따라 부모가 편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남의 부담은 부모 부양에 그치지 않는다. C씨(45·회사원)는 “딸 하나를 두고 있는데, 이제 (노후는) 포기했다”며 딸만 가진 장남이란 것이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다. 그는 또 가정경제를 혼자 맡는 것에 대해서도 “남자에게 너무 과중한 부담”이라고 답했다.

동덕여대 손승영 교수(여성학)는 “장남이 제사와 부모 부양 때문에 많은 부담을 가진다는 지적도 맞지만 장남이라는 이유로 다른 형제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는 등 특권을 많이 누린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장남의 아내라는 원죄=장남 D씨(37·목사)는 “어머니 회갑연을 준비하면서 예산을 초과하자 형제들이 ‘장남이면 그 정도는 책임져라’고 해 부담을 떠안았다”며 “여기에 아내는 아내대로 맏며느리라고 책임이 더 간다”고 토로했다.

사실 ‘장남 노릇’이라는 역할은 맏며느리에 의해 많이 수행되기 때문에 장남 역할의 상당 부분은 아내의 몫이다. 최근 베스트셀러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에 대한 인기만큼이나 비난의 목소리가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49년차 장남’은 이 책에서 ‘나쁜 남편이자 무능한 큰형, 불효자로서 끝없는 죄책감과 책임을 짊어졌다’고 말한다.

반면 인터넷 서점에 리뷰를 올린 한 네티즌(psysun75)은 “여자의 희생을 베이스에 깐 장남의 힘들다는 하소연은 사치”라고 말했고, 자신을 큰며느리라고 밝힌 또 다른 네티즌(minjaemon)은 “그가 장남 행세로 체면을 세우는 동안 힘들어 집까지 나갔던 아내의 고생은 어찌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재혼가정의 남자도 괴롭다=재혼가족에서 자녀의 성(姓)과 관련된 어려움은 남성도 마찬가지로 겪는 문제다. 재혼하는 여성과 결혼하는 남성, 나아가 그 가족 전체가 자녀의 성 때문에 고민한다.

E씨(36·교사)는 “아버지와 성이 다르게 기재돼 있는 학생기록카드 때문에 너무 힘들어 하는 학생들을 면담하면서 호주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F씨(34·회사원)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있는 아내와 2년7개월 전 결혼했다. 집안의 반대가 심했지만 그 자신이 장남이 아니고 아내의 아이가 그나마 아들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결혼이 가능했다. 그러나 내년 그 딸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고민이 크다.

“성이 다르다는 것이 가장 걱정이 됩니다. 어머니는 저한테 ‘너희는 아직 소식이 없느냐’고 자꾸 물어보시는데…스트레스 받을까봐 와이프한테는 얘기도 못하고 힘이 듭니다.”

한 교수는 “호주제 문제를 여성의 시각으로만 볼 게 아니라 가족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며 “호주제 폐지는 여성 및 그 자녀의 삶뿐 아니라 남성들의 삶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진경기자 kjk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