펼침과 움츠림(3)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가 약간의 장졸을 거느리고 함곡관으로 쫓겨 와 받아들여 주기를 청해왔습니다. 심하게 몰리는 눈치라 받아들여 주었더니, 이제는 폐구로 가서 대왕을 찾아뵙겠다고 합니다.”
그 같은 전갈을 받자 한왕 유방은 너무 뜻밖이라 잠시 어리둥절했다. 장량과 대장군 한신을 불러놓고 물었다.
“상산왕이라면 바로 옛날의 조왕(趙王) 아니요? 넓고 기름진 조나라 땅을 봉지로 받은 데다, 그 왕 장이는 또 현능하기로 이름난 사람인데 누구에게, 어찌하여 나라를 잃고 고단하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단 말이요?”
둘 중 더 오래 관외(關外)에 있었던 장량이 아는 대로 말했다.
“이는 아마도 진여(陳餘)의 짓일 겝니다. 장이와 진여는 지난날 서로를 위해 목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나, 거록(鉅鹿)의 싸움 때 한번 틀어지고는 끝내 옛 정분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항왕이 장이를 상산왕으로 삼아 조나라를 주고 조왕 헐(歇)은 대왕(代王)으로 내치자, 진여는 장이와 한 하늘을 일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제왕(齊王) 전영(田榮)이 항왕에게 반기를 들자 그와 짜고 장이를 급습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장이는 마땅히 저를 상산왕으로 세워준 항왕에게로 달아나 구원을 청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만약 장이에게 고를 겨를이 있었는데도 항왕을 마다하고 대왕을 찾아왔다면 이는 몹시 경하할 일입니다.”
“장이가 날 찾아오는 것이 무슨 경하할 거리가 되오? 만약 항왕이 장이에게 화를 내면 오히려 우리에게 짐만 되는 게 아니겠소?”
그러자 이번에는 한신이 나서 말했다.
“항왕이 화를 낸다면 먼저 자신이 세운 왕을 함부로 공격해 내쫓은 전영과 진여에게 일 것입니다. 특히 전영은 이미 전도(田都)와 전불(田불)을 죽여 두 번이나 항왕의 속을 긁어둔 바 있어 이제 더는 용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인은 장이를 어찌 대접해야 하겠소?”
한왕의 그 같은 물음에 장량이 다시 받았다.
“반갑게 맞아들여 후하게 대접하셔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나라를 잃고 쫓기는 몸이 되었지만 장이는 결코 만만하게 볼 인물이 아닙니다. 장차 대왕께서 천하를 다투시려면 반드시 크게 써야 할 인물입니다.”
이에 한왕은 장이를 폐구로 불러들이게 했다. 과연 세상은 헛소문을 전하지 않아 만나보니 장이는 나이가 들어도 헌걸찬 장부요 호걸이었다. 자잘한 원한보다는 크고 넓은 포부로 한왕을 속 시원하게 해주었다.
한왕이 폐구를 떠나 함곡관을 나가볼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런 장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폐구에서 쉰 지도 한 달이 다 된데다, 장량이 자기 사람이 되어 돌아오자 더욱 기세가 오른 한왕은 장이의 은근하면서도 끈질긴 권유에 다시 한번 대망의 나래를 펼쳤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