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이 어제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국회 행자위에 상정했다. 16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시킨 법을 시행도 해 보지 않고 개정안을 상정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친일 진상 규명을 둘러싸고 ‘역사의 정략화’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먼저 기존 법을 시행해 보는 게 합리적인 수순이다.
그런데도 여당은 개정안을 서둘러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 “친일법을 반대하는 사람은 유전인자를 감식해 보아야 한다”는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언급은 ‘개정안에 무조건 따르라’는 강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친일 혐의자들이 거의 세상을 떠났을 뿐 아니라, 최소 60∼70년 전에 발생했던 일을 파헤치는 것에 신중론이 대두되는 것은 당연하다. 찬성 아니면 반대라는 이분법적 사고와 성급한 태도야말로 친일 규명에서 반드시 경계되어야 한다.
여당이 통과시키겠다고 내놓은 개정안은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공정성과 균형감조차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회적 합의를 얻지 못한 ‘그들만의 법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친일 규명을 주도할 9명의 위원회 구성이 그 대표적 예다.
개정안은 대통령이 위원들을 임명하고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하고 있다.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입맛에 맞는 역사관을 갖고 있는 인사들로 채워질 공산이 크다. 더구나 위원들의 자격요건을 ‘업무를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막연하게 규정해 임명권자의 임의성을 확대하고 있다. 국회 추천 후 대통령이 임명하기로 한 기존법에 비춰 개악(改惡)이 아닐 수 없다.
정당한 사유 없이 출석에 불응한 조사대상자에 대해 동행명령장을 발부할 수 있게 하고 거부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게 한 것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 친일 행위에 대한 조사내용의 사전 공개가 가능해져 ‘인민재판식’ 여론 재판이 우려되는 등 곳곳이 문제투성이이다.
따라서 개정안은 폭넓은 의견수렴을 거쳐야 마땅하다. 이런 개정안을 밀어붙이려 한다면 정치적 의도가 개입됐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핑계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이다. 이럴 경우 또 다른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