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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 칼럼]좌우 이념논쟁의 한계

입력 | 2004-09-08 18:53:00


1950년과 1980년. 그것은 나이 어린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치른 가장 큰 시련의 두 고비였다.

1945년 이후 남한 사회는 이념적으로 양분돼 좌우가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1948년 우파 정부가 남에, 좌파 정권이 북에 수립된 뒤에도 남한에서는 지하조직 속에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좌익은 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당시 좌익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던 수는, 특히 지식인 학생층 사이에선 절반을 크게 밑돌진 않았다고 여겨지는데 어떨지.

▼1950년과 1980년▼

그럴 수가 있는 것이 좌익엔 언제나 역사와 세계를 해석하는, 쉽게 먹혀들어갈 한 세트의 ‘이론’이 있는 데 반해 우익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좌우의 싸움은 흔히 ‘웅변’과 ‘눌변’의 논쟁이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좌익이 공격하는 남한의 비리는 눈앞에 널려 있으나 북한의 그것은 38선에 가려 볼 수 없었다.

1950년, 남침전쟁은 ‘진리의 순간’이었다. 전쟁의 폭풍은 모든 것을 폭로했다. 전차 한 대도 없이 떠벌린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6·25 남침 2주 전까지도 특사를 남파해 선전하던 김일성의 ‘평화’통일론, 그 모든 말의 거짓이 38선의 포성으로 일격에 드러나 버린 것이다. 그럴뿐더러 인민군 점령하의 3개월은 북한 체제의 현실을 깨닫게 한 값비싼 체험이 되었다. 경찰의 몽둥이로도, 부모의 눈물로도 어쩔 수 없던 ‘좌익소아병’에서 수많은 지식인 젊은이들이 이때 벗어났다.

더욱이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열흘도 안돼서 발표된 남로당 간부 및 월북 좌익 문인에 대한 피의 숙청은 북을 동경하던 남한의 심정적 좌파들을 잠재워 버렸다. 그로부터 한 세대 동안 남한에는 군사정권의 유신체제하에서도 반독재 투쟁은 있었으나 ‘반미’ ‘친북’은 구호조차 나오지 않았다.

1980년 새로운 전기가 왔다. 국군이 국토에서 국민을 대량 살육한 광주 참극은 남한의 자생적 좌파 탄생의, 유혈이 낭자한 산욕이었다. 게다가 광주 대참극의 주역들이 청와대 권좌에 오르면 몇천 억원씩의 돈을 챙기고 나온 것이 들통 났다. “정의가 없다면 왕국도 도적집단과 다를 게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거짓도 과장도 아님을 확인하게 됐다. 1980년대의 젊은이들에겐 이제 국가는 수호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타도해야 할 대상이 됐다 해서 그게 그들(만)의 잘못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때부터 대학가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공공연하게 ‘반미’ ‘친북’ 구호가 등장했다. “우리 세대의 많은 친구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통해서만 광주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적어 보낸 내성적인 어느 학생의 고백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경찰의 몽둥이로도, 부모의 눈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좌익소아병에 가장 촉망 받는 총명한 젊은이들이 걸려든 것을 본 심정은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무책이었다. 북이 남으로 와서 그 실체를 보여 주는 게 가장 확실한 치유책이기는 하나 그걸 두 번 치르기엔 너무나 값비싼 처방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천우신조인가, 소련 및 동유럽의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1989년부터 한두 해 사이에 총체적으로 붕괴해 버린 것이다.

▼극좌와 극우를 넘어서▼

1950년과 1980년. 그것은 한국현대사의 두 원죄다. 남침전쟁이 좌파의 원죄라면 광주참극은 우파의 원죄다. 북한체제와 달리 남한체제가 아무리 다원적인 이념의 스펙트럼을 지녔다 해도 6·25와 5·18을 단죄하지 않거나 그 책임자를 면책할 수는 없다. 그것이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이념적 마지노선이다.

남침전쟁과 광주참극을 각각 긍정하는 세력 사이에는 어떤 상생도 화해도 있을 수 없다. ‘이념적 내전’ 상황을 살고 있는 오늘 침묵하고 있는 대다수 국민은 마음속에서 이 두 원죄를 단죄하고 있다. 6·25와 5·18의 마지노선 밖으로 일탈하는 극좌·극우만 아니라면 그 테두리 안에서는 좌우가 경쟁 상생할 수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넓다.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