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은 2차 대전 종전 전부터 김일성(金日成)을 북한의 지도자감으로 지목하고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에 대비해 온 사실이 밝혀졌다.
또 6·25전쟁은 당시 소련 최고 지도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집요한 설득 끝에 북한이 남침함으로써 시작된 것으로 다시 확인됐다.
8일 관영 러시아 방송은 북한정권 수립 56주년(9일)을 맞아 김일성 정권 수립과 6·25전쟁 관련 비화를 담은 특집방송 ‘위대한 수령의 비밀’을 방영했다.
소련 군정 당시 김일성의 고문이었던 그리고리 매클레르 예비역 대령(95)과 정상진 전 북한 문화선전부상(차관·86), 장학봉 전 북한 정치군관학교 교장(87) 등 러시아 거주 생존 증인의 회고와 자료가 공개됐다.
방송은 이들의 증언과 자료를 분석해 “스탈린은 처음 미국과의 충돌을 우려해 남침에 반대했지만, 1950년 2월 소련을 비밀 방문한 김일성이 ‘지금이 통일의 적기’라고 설득하자 묵시적으로 동의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소련은 북한의 요청으로 200여기의 미그 전투기를 비밀리에 6·25전쟁에 출격시켰으며 조종사들은 중국 인민해방군 복장을 해 비밀을 유지했다.
방송은 또 김일성이 북한 최고 지도자로 등장하는 과정을 상세히 다뤘다.
1945년 2월 미영소의 얄타 정상회담 직후 당시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한반도 분할과 소련군의 진주 가능성에 대비해 극동군 정치부와 정보당국에 한반도의 지도자감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8명의 후보 중 소련극동군 산하 88특별여단 제1대대장 김일성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 1940년 소련으로 망명, 하바로프스크 군사학교 산하 장교양성소를 마치고 소련군 대위가 됐다.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귀국할 때까지 김성주라는 본명도 함께 사용했다. 그러나 너무 젊은 데다 귀국 초기 한국어까지 서툴러 북한 주민들 사이에 “김일성 장군 같지 않다”는 의심이 퍼져나갔다.
이에 따라 소련은 김일성에게 지도자 수업을 시키면서 선전과 정치공작을 주도했다. 김일성의 연설문까지 소련 당국이 써줬다. 김일성으로 하여금 평양 부근에 있는 그의 생가 만경대를 방문토록 하는 이벤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런 노력 끝에 1949년 김일성이 소련을 처음 공식 방문했을 때 그는 이미 빨치산 지도자나 소련군 장교의 티를 벗고 어엿한 ‘국가지도자’로 변신해 있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