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방송 토론으로부터 빚어진 며칠간의 소동을 지켜보면서 우울한 마음으로 확인한 역설이 하나 있다. ‘친일 진상 규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친일파의 진상이 규명되기를 원치 않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진실로 친일 문제의 진상이 규명되고 그 오래된 역사의 부채가 청산되기를 원했다면, 역사의 진실을 담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그러나 보다시피 사태는 그와 정반대였다. 이 소동의 저변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초조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친일파’ 문제에 관한 한 모든 한국인에게 진상은 자명하다. 남은 일은 단죄의 범위를 육군 소위 이상으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정도의 일이다. 이 자명한 일에 ‘딴죽’을 거는 자는 똑같은 친일파일 뿐이다. 대체로 이것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 문제를 대하는 일반의 인식인 듯하고, 이 교수 사건도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법으로 과거사가 ‘규명’되고 일제의 잔재가 ‘청산’되고 ‘민족정기’가 바로 선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과거사는 더욱더 암흑에 덮이고 일제의 잔재는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민족정기론’이야말로 일본 우익이 가장 애호하는 이념이라는 사실은 ‘민족정기 수호’를 위해 모인 국회의원들에게는 전혀 인식되지 않는 듯하다).
일제의 식민 지배는 누구나 알다시피 근 40년에 걸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에 해당하는 기간의 정치적 행위를 60년이 지난 시점에서 법률로 규명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인간과 역사에 대한 몰이해의 소산이다. 중년의 나이에 이른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더는 일본 제국의 ‘신민’일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난감해 했을 수많은 한국인의 착잡한 내면을 헤아리는 지혜 없이 정치적 계산과 법률적 장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한 진상은 규명되지 않는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친일 진상 규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은 집단적 기억을 통한 집단적 치유(治癒)라는 고난도의 철학적, 인륜적 문제임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자랑스럽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고통스럽지만 직시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과거, 그것과 이를 악물고 마주 서려는 용기 없이 새로운 삶은 없다. 성숙한 인간이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친일 문제에 관해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보여 준 행동들은 성숙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체 ‘친일’이란 무엇인가? 이 가장 기초적이고도 원론적인 질문에 대해서조차 우리는 아무런 합의도 기준도 갖고 있지 않다. ‘친일’의 개념과 범주, ‘청산’의 방법과 목표 등에 관해서 어떤 논의나 합의의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무언가 딴소리를 하는 자’에 대해 일단 비난부터 퍼붓는 것이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제 ‘친일 진상 규명’은 또 하나의 성역, 또 하나의 금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진상 규명을 가로막는가? 진실로 묻고 싶다.
김철 연세대 교수·한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