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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검의 대가’… 유럽판 ‘칼의 노래’

입력 | 2004-09-10 17:03:00

작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에선 체스, ‘뒤마 클럽’에선 고문서, ‘항해 지도’에선 항해술을 파고들었던 작가가 이번 ‘검의 대가’에선 정통 검술을 연구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검의 대가/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350쪽 9500원 열린책들

작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는 쉰한 살이던 2002년 스페인 한림원 정회원이 됐다. 정회원 가운데 두 번째 젊은 나이였다. 서른다섯 살 늦은 나이에 데뷔해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뒤마 클럽’부터 ‘깨끗한 피’ ‘남부의 여왕’에 이르기까지 신속하게 문학적 성과를 쌓아올린 덕분이다.

그의 작품은 일곱 편이 영화화됐는데 그 가운데 ‘검의 대가’가 1992년 처음 영화로 만들어져 오스카상 최종 후보에까지 올랐다.

1988년 출간된 이 작품은 미남 무관들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곤 했던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의 치세가 도처의 모반 기운으로 흔들리던 120년 전 마드리드를 배경으로 한 ‘검객 이야기’다.

이 작품이 올해 국내에 소개되는 것은 그간 페미니즘의 그늘 아래 있던 남성성(性)이 떠오르고 있는 국내 독서계의 움직임과 관련 있어 보인다.

세상과 담을 쌓은 채 홀로 사는 쉰여섯 살의 검술 교사 돈 하이메 아스타를로아에게 어느 날 도도한 미모의 여인 아델라 데 오테로가 찾아와 치명적인 검법인 ‘200 에스쿠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 온다.

그에게 교습받던 그녀는 어느 날 한 후작과 대련하게 해 달라고 부탁해 오는데 아스타를로아는 착잡한 질투심을 억누르며 둘을 소개해 준다. 어느 날 후작은 그에게 “목숨처럼 생각해 왔다”는 서류들을 맡기면서 그녀의 신분에 대해 물은 뒤 며칠 후 저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시신에는 ‘200 에스쿠도’ 검법으로 베인 흔적이 있다.

아스타를로아는 정계의 친구한테 서류를 보여 주지만, 이 친구마저 며칠 후 침대에 묶인 시체로 발견된다. 모든 이들이 오테로를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며칠 후 그녀마저 주검으로 나타난다. “다음은 내 차례”라며 비장해진 아스타를로아의 눈앞에 어느 날 새벽 차마 상상치 못했던 자객이 찾아와 “서류를 내놓으라”며 칼끝을 겨눈다.

마드리드 정계의 권모술수와 연쇄살인이 미스터리를 더해 가는 세련된 추리소설이다.

추리기법을 쓰는 세계적 작가로 움베르토 에코가 현란한 인문학적 지식의 군무(群舞)를 들고 나온다면, 토머스 해리스는 섬세하고 인상적인 감정과 배경 묘사, 존 그리셤은 단거리 선수처럼 질주하는 캐릭터들을 특장으로 내세운다.

레베르테의 경우 집요하게 취재한 전문 지식들이 소설 속에 녹아 있다. “깊숙이 카르트, 반 바퀴 돌며 파라드, 앙 카르트로 찔러!” ‘검의 대가’의 펜싱 용어들은 낯설기보다 박진감을 더한다.

여기에 빛을 더하는 것은 아스타를로아와 오테로라는 두 인물 사이의 미묘한 긴장이다. “어디서 옷을 갈아입을까요?” 여인 오테로의 첫 질문은 엄숙한 칼의 대가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여 검사의 펜싱복(服) 고리를 채워 주기 위해 아스타를로아가 그녀의 등 뒤에 섰을 때 흘러나오는 장미향, 하반신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는 펜싱 타이츠 역시 그렇다.

그러나 속세와 절연한 ‘검의 대가’에게 아무래도 그녀는 ‘칼이 숨겨진 채 배달된 백합 꽃다발’인 것만 같다. 등잔 위로 흐르던 연기가 잘려나가고, 핏줄기가 붉은 타월처럼 날아가는 혈투는 그녀와의 만남 이후부터 시작됐으니.

권기태기자 kkt@donga.com